팬미팅 장소부터 메이크업·안무까지…의견 표출 수단 돼
"내 손으로 키우는 '육성 팬덤' 일반화…내부 자정 거쳐 성장해야"
내 아이돌 소속사 손에 못 맡긴다?…우후죽순 느는 팬 트럭시위
요즘 K팝 그룹이라면 트럭 전광판에 이름 한 번 올려보지 않은 경우를 찾기가 힘들다.

연예 기획사를 향한 팬덤의 의견 표출 수단인 '전광판 트럭 시위'가 걸그룹과 보이그룹, 신인부터 베테랑까지 가리지 않고 우후죽순 늘고 있기 때문이다.

데뷔 전이나 초부터 그룹의 성장을 지켜보는 '육성 팬덤' 문화가 일반화되면서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팬덤의 의지가 기획사 건물마다 자리 잡은 수십 대의 트럭으로 드러나고 있다.

내 아이돌 소속사 손에 못 맡긴다?…우후죽순 느는 팬 트럭시위
그룹 샤이니는 올해 5월 데뷔 15주년 기념 팬미팅 장소를 개최 전에 잠실 실내체육관으로 변경했다.

원래 개최 장소였던 일산 킨텍스가 시야 제한·음향 부실 등으로 팬미팅 장소로 적합하지 않다며 팬들이 트럭 시위를 비롯해 팬미팅 보이콧까지 진행했기 때문이다.

같은 SM엔터테인먼트 소속인 가수 태연의 팬덤은 지난 달 SM이 태연의 악플러에 대한 대응을 제대로 하지 않는 등 부당한 대우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SM 사옥 앞에서 트럭 시위를 진행했다.

그룹 엑소의 팬덤도 소속사의 부실 지원을 이유로 트럭을 보냈다.

이런 트럭 시위는 팬들의 충성도가 높은 일부 장수 그룹만의 일이 아니다.

2020년 데뷔한 그룹 엔하이픈의 팬덤은 올해 발매한 신곡 '바이트 미'(Bite me)의 안무가 선정적이라며 하이브 사옥 등에서 트럭 시위를 진행했으며 데뷔 2년 차 아이브의 일부 팬덤도 멤버 장원영을 소속사가 혹사한다는 등의 이유로 시위를 전개했다.

이 외에도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엠넷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보이즈 플래닛' 출연 연습생의 팬들도 "단기적인 파생그룹 추진을 반대한다"며 트럭을 보내는 등 소속사와 연차, 팬덤 규모를 가리지 않고 트럭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내 아이돌 소속사 손에 못 맡긴다?…우후죽순 느는 팬 트럭시위
2019년께 등장한 트럭 시위는 대면 집회가 어려운 팬데믹 시절 편리하게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지며 K팝뿐 아니라 스포츠, 게임 업계로 번지며 일반화됐다.

처음에는 소속사의 아티스트 지원 부족 등을 주로 규탄하던 트럭 시위의 내용은 이제 메이크업부터 안무, 팬미팅 장소, 개인 스케줄 관리 등 셀 수 없이 다양해졌다.

이처럼 아이돌 팬덤의 트럭 시위가 갈수록 줄지 않고 늘어나는 배경에는 데뷔 초나 그 이전부터 그룹의 성장을 지켜보고 참여하는 '육성 팬덤' 문화가 있다.

과거 1세대 아이돌 그룹의 팬이 연예인을 '우리 오빠·여신님'이라고 부르며 동경의 대상으로 삼던 것과 달리 최근에는 '우리 애들'이라는 호칭처럼 팬을 키워가는 대상으로 여기면서 더 적극적으로 활동에 개입하려 한다는 것이다.

최근 컴백한 한 아이돌 그룹의 팬 커뮤니티에는 "우리 애들이 이번엔 대중적으로 '빵' 떠야 하는데, 소속사가 이상한 콘셉트만 민다"는 의견이 올라올 만큼 육성 팬덤은 팬을 넘어 '제작자'의 관점도 자처한다.

이런 팬덤이 보여주는 강한 충성도는 그룹의 생명력과도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이에 기획사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신인 그룹의 데뷔 과정을 콘텐츠로 만들어 공개하며 이런 경향을 부추기기도 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지금의 K팝은 제작자들이 일방적으로 만든 결과물을 내놓는 게 아니라 팬덤과 함께 만드는 구조"라며 "소속사 입장에서도 초반에 팬이 개입할 여지를 주는 게 팬덤을 키울 수 있으니 불편한 점도 감수하면서 그렇게 하는 면이 있다"고 말했다.

내 아이돌 소속사 손에 못 맡긴다?…우후죽순 느는 팬 트럭시위
다만 지나치게 세부적인 사항까지 '시위'라는 강도 높은 수단으로 의견을 내는 지금의 방식은 팬과 소속사, 대중의 피로도를 높인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아이돌 그룹의 팬으로 활동 중인 20대 권모 씨는 "트럭 시위에 대해선 팬덤 안에서도 의견이 갈린다"며 "의견 반영이 잘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소속사와 팬덤의 관계만 나빠지게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 대형기획사 관계자는 "트럭 시위도 팬의 관심이라 생각하나 현실적으로 모든 의견을 다 반영하기는 쉽지 않다"며 "특히 회사도 나름의 긴 전략과 방향성이 있는데 단기적인 면만 보고 의견을 보내면 곤란한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최근 수년 사이 K팝이 급속한 성장을 했듯 팬덤 문화도 그에 발맞춰 변화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정덕현 평론가는 "아이돌이 1.0, 2.0 등 세대를 거쳐 진화했듯 팬덤도 성장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며 "팬덤 내부의 자정 작용 등을 통해 팬의 소통 방식도 진화해 갈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