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그린 아내 그림 보고 반한 연하남…불륜의 결말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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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대표 자연주의 화가
페데르 세베린 크뢰위에르
비참한 출생, 성공, 그리고 배신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
페데르 세베린 크뢰위에르
비참한 출생, 성공, 그리고 배신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

그랬던 남자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덴마크의 ‘국민 화가’로 우뚝 섰습니다. 아름다운 아내와 팔짱을 낀 채 해변을 거닐며 달콤한 여름밤을 만끽하는 남자. 해는 수평선 너머로 떨어졌지만 아직 하늘에 푸르스름한 빛이 남아 있는 잠깐의 시간, 하늘빛이 바다 빛과 뒤섞여 가장 아름다운 이때를 사람들은 ‘푸른 시간’(Blue hour)이라 불렀습니다. 하루 중 남자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었지요. 하지만 그는 몰랐습니다. 푸른 시간이 지나면 어두운 밤이 찾아오듯, 자신의 삶에도 짙은 어둠이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을요.
남자의 이름은 노르웨이 태생의 덴마크 화가 페데르 세베린 크뢰위에르(1851~1909). 최근 몇 년 새 재조명 움직임이 일고 있는 자연주의 화가입니다. 오늘은 크뢰위에르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의 아름다운 작품들과 함께 소개합니다.
정신병원에서 태어난 아이

다행히도 이모 부부가 크뢰위에르를 맡아 줬습니다. 이모는 크뢰위에르를 아껴 줬습니다. 문제는 지나치게 아꼈다는 겁니다. 이모는 소년이 조금이라도 다칠까 봐 학교에 가지도, 나가서 친구들과 놀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좋은 뜻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크뢰위에르는 일종의 감금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이모부가 한마디 해줬으면 좋았겠지만, 그는 크뢰위에르에게 무관심했습니다. 친구도 없는 소년이 할 수 있는 놀이라고는 집 안의 물건들을 그림으로 그려보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크뢰위에르의 운명이 뒤바뀌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소년이 아홉 살 되던 해였습니다. 생물학자인 크뢰위에르의 이모부는 미생물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논문에 참고자료로 붙일 그림을 그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현미경용 카메라를 쓰면 되겠지만, 당시에는 현미경으로 보이는 광경을 연구자가 직접 그림으로 옮겨야 했거든요. ‘크뢰위에르가 맨날 그림만 그리던데, 한번 맡겨 볼까….’ 이모부는 크뢰위에르를 불러 현미경을 보여주고 한번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완성된 결과물은 아홉 살짜리가 그렸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기회를 받은 크뢰위에르는 곧바로 천재성을 드러냅니다. 9살 때 미술학교에 들어간 그는 10살 때 바로 상급 학교로 진학했고, 13살 때는 덴마크 역사상 최연소로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예비학교에 입학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를 한번 본 선생님들은 입을 모아 “누구보다도 빨리, 잘 그리는 천재”라고 평가했습니다.

스카겐 바다, 그리고 사랑

크뢰위에르는 그 광경을 보고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스카겐의 대낮은 끔찍하도록 지루하지만, 해가 지고 달이 바다 위로 떠오르면 수정처럼 맑고 매끄러운 물이 빛을 반사한다. 나는 그 모습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는 매년 여름마다 이곳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덴마크 출신의 동료 화가들도 그와 함께 스카겐으로 향했지요. 이들은 스카겐에서 먹고, 마시고, 그림을 그리고, 예술을 논했습니다.

불같은 사랑에 빠진 둘은 이듬해인 1889년 결혼했고, 1년간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1891년에는 스카겐에 큰 집을 마련해 정착했고요. 스카겐의 자연, 그 속에 있는 아내와 동료 예술가들은 크뢰위에르가 가장 즐겨 그린 소재였습니다. 그리고 결혼 6년 차인 1895년 딸이 태어납니다.


‘푸른 시간’은 저물고

크뢰위에르는 아내의 이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천재인 크뢰위에르가 보기에 아내의 재능은 평범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냥 취미로 그리면 되지, 왜 억울해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네.’ 크뢰위에르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과로는 병을 낳는 법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크뢰위에르는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엔 유전적인 영향도 있었을 겁니다. 그래도 크뢰위에르는 무리해서 일하는 걸 멈추지 않았고, 그 결과 상황은 계속 더 나빠졌습니다. 정신질환이 점점 악화하면서 부부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마리는 불륜 사실을 크뢰위에르에게 고백하며 “이혼해달라”고 했지만,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던 크뢰위에르는 “잠깐의 불장난일 뿐이다. 다시 생각해 보라”며 붙잡았습니다. 하지만 한 번 떠난 마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마리와 알프벤의 불륜은 계속됐습니다. 간절히 마리에게 매달리던 크뢰위에르는 1905년 그녀가 알프벤의 아이를 갖게 되자 결국 이혼에 합의하게 됩니다.

바다와 하늘만 남았네
아내가 떠나자 크뢰위에르는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정신질환은 빠르게 악화했고, 시력도 나빠져 한쪽 눈이 실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평생 그려온 그림도 점점 그리지 못하게 됐습니다. 마리가 떠난 지 불과 4년 뒤인 1909년, 크뢰위에르는 5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사랑과 눈물이 담긴 그 모든 드라마는 모두 파도에 쓸려 가버리고, 스카겐 바다와 하늘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전과 그대로입니다. 남은 건 크뢰위에르의 작품들 뿐이네요. 허무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생전 겪은 그 모든 번잡한 일에도 불구하고 크뢰위에르가 자신이 남긴 고요하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기억되는 건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삶은 짧지만 예술은 영원하니까요.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Peder Severin Kroyer’(Peter Michael Hornung 지음), ‘Peder Severin Kroyer’ (Eric Maurice Fonsenius 지음)과 프랑스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에서 2021년 열렸던 크뢰위에르 전시의 도록 ‘L'heure bleue de Peder Severin Kroyer’ (Dominique Lobstein , Mette Harbo Lehmann 등 지음)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2012년 영화 ‘마리 크뢰이어’의 내용에는 상당 부분 픽션이 섞여 있어 배제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2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