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비틀쥬스'가 더욱 강력한 'K-유머'와 깊어진 공감으로 돌아온다. 언어의 마술사 김수빈 번역가가 초연에 이어 참여하는 가운데, 장르를 넘나들며 독보적인 감각을 선보이는 코미디언 이창호가 코미디 각색으로 참여한다. 팀 버튼의 동명 영화(1988)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비틀쥬스'는 갓 유령이 된 부부가 자신들의 집에 이사 온 낯선 가족을 내쫓기 위해 이승과 저승 사이에 갇혀 있는 비틀쥬스와 손을 잡고 벌이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다룬다.기존의 틀을 벗어난 완전히 새로운 감각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뮤지컬 '비틀쥬스'는 대사에 블랙 코미디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 현지화가 매우 중요했다. 줄거리, 캐릭터, 무대 구성 모두에서 '다름'을 추구하는 난이도 높은 각색 작업을 위해 의기투합한 김수빈 번역가와 코미디언 이창호는 각자의 독보적인 강점을 결합하여 최상의 시너지를 발현할 예정이다.김수빈 번역가는 이미 초연 당시 '비틀쥬스'의 까다로운 원작을 한국 정서에 맞게 '통쾌하되 불쾌하지 않은 유머'로 치밀하게 현지화 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또한 원작의 스탠드업 코미디 구조를 살리면서도, 보편성과 한국화를 핵심으로 ‘기분 좋은 매운맛’이 나는 풍자를 담아내는 언어적 역량을 증명했다.돌아오는 시즌에는 독창적인 감각과 트렌디한 감수성을 지닌 코미디언 이창호가 코미디 각색가로 합류해 말맛을 극대화한다. 새로운 영역에 도전장을 내민 이창호 작가는 자신만의 강점인 시대를 읽는 감각과 기발한 유머 코드를 김수빈 번역가의 정교한 언어 위에 생동감 넘치는 표현을 더해 젊은 세대부터 중장년층까지 블랙 코
주말이면 이화여대 거리를 방문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는 골목마다 옷 가게가 넘칠 지경이었고 미로처럼 이지는 좁은 길에는 인파가 넘쳐났다. 서울에서 힙하다는 젊은이를 집결시킨 듯한 진풍경이 펼쳐지는 장소가 바로 이화여대 거리였다. 하지만 내가 부지런히 그곳을 찾은 이유는 유행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방문의 목적은 이화여대 정문을 마주 보고 왼쪽 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리어카였다.서른 전후로 보이던 그 남자는 리어카에 백판을 가득 싣고 있었다. 소위 해적판이라고 불렸던 백판은 조악한 음질로 만들어진 복사판 레코드였다. 가격은 500원 정도였지만 리어카 주인은 일부 백판에 라이선스 레코드와 비슷한 값을 매겨놓기도 했다. 음악이 몹시 귀하게 취급받던 시절이라 처음 보는 레코드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았다. 그 틈새를 메워준 존재가 바로 백판이었다.토요일 오후에 방문했던 이대 거리에는 리어카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다른 길에서 장사를 하고 있나 싶어 한 시간가량을 돌아보았지만 그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7월 폭염을 무릅쓰고 일주일 후에 다시 신촌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어야만 했다. 때는 1980년대 후반이었다. 방학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대학가는 선남선녀로 발 디딜 틈이 없는 상황이었다.이번에는 다행히 백판을 가득 실은 리어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아드레날린이 쏟아져 나왔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백판 더미는 수줍은 자태로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주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손가락이 시커메질 때까지 먼지 가득한 백판을 뒤졌다. 절반 정도는 2주 전에 보았던 음반이었
건축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이곳과 저곳을 '구분'하는 행위에서 시작된 예술일지도 모른다. 특히 건축에서 벽은 안과 밖을 구획하는 핵심적인 장치다. 그리고 벽에 만든 문은, 안으로 들어올 사람과 그렇지 못할 사람을 결정짓는다. 그렇게 문턱이라는 경계는 공간에 질서와 안전을 부여한다. 만약 누구나 우리 집에 들어올 수 있다면, 과연 그곳을 '나의 공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그러나 출입을 ‘구분’하는 과정이 ‘차별’로 변질될 때, 건축은 비극의 무대가 된다. 차별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벽이 아닌 심리적인 벽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그 벽은 물리적인 벽보다 훨씬 단단하다. 영화 ‘그린 북’의 배경인 1960년대 미국은 이미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시행된 시대였다. 그러나 겉으로만 그 벽이 무너졌을 뿐, 사람들 마음속엔 여전히 유색인종을 향한 보이지 않는 장벽이 남아있었다.토니의 집잠에서 깬 이탈리아계 백인 토니는 자신의 집 안에서 흑인 수리공 두 명을 마주한다. 토니의 아내는 고생한 그들에게 정중히 음료를 건넨다. 그러나 그들이 떠나자마자 토니는 그들이 사용한 유리잔이 마치 더러운 물건이라도 되는 듯 집어 들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제도나 규칙 같은 합리적인 이유가 아닌, 일상에 스며든 무의식적 차별을 드러내는 장면이다.토니는 집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 사람을 구분한 것이다. 그리고 유색인종은 당연히 불합격이었다. 만약 그가 흑인 수리공이 올 줄 미리 알았다면, 주저하지 않고 백인 수리공으로 교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폭력은 그 시대 사람들에겐 평범한 상식이었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순간이 우리에게 더욱 아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