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졸업>, <더 챔프>, <콘도르의 3일> 등
수많은 영화 OST를 담당한 영화음악가 데이브 그루신
주말이면 이화여대 거리를 방문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는 골목마다 옷 가게가 넘칠 지경이었고 미로처럼 이지는 좁은 길에는 인파가 넘쳐났다. 서울에서 힙하다는 젊은이를 집결시킨 듯한 진풍경이 펼쳐지는 장소가 바로 이화여대 거리였다. 하지만 내가 부지런히 그곳을 찾은 이유는 유행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방문의 목적은 이화여대 정문을 마주 보고 왼쪽 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리어카였다.
서른 전후로 보이던 그 남자는 리어카에 백판을 가득 싣고 있었다. 소위 해적판이라고 불렸던 백판은 조악한 음질로 만들어진 복사판 레코드였다. 가격은 500원 정도였지만 리어카 주인은 일부 백판에 라이선스 레코드와 비슷한 값을 매겨놓기도 했다. 음악이 몹시 귀하게 취급받던 시절이라 처음 보는 레코드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았다. 그 틈새를 메워준 존재가 바로 백판이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백판을 가득 실은 리어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아드레날린이 쏟아져 나왔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백판 더미는 수줍은 자태로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주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손가락이 시커메질 때까지 먼지 가득한 백판을 뒤졌다. 절반 정도는 2주 전에 보았던 음반이었다. 잠시 후 주인은 말없이 내게 처음 보는 레코드를 건넸다.
[ ♪Mountain Dance (GRP Live in Session) ]
파란색 바탕의 백판에는 [GRP Live In Session]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다. 앨범 상단에는 데이브 그루신, 리 릿나워, 다이안 슈어, 데이브 발렌틴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나는 [GRP Live In Session]을 통해 데이브 그루신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 후 CTI 레이블을 대표하는 건반주자가 밥 제임스라면 GRP 레이블에는 데이브 그루신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추가로 알게 되었다.
1934년에 태어난 데이브 그루신은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의 음악적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피아니스트, 키보디스트, 작곡가, 편곡가, 프로듀서, 밴드 리더로 불린 그는 1967년 <이혼 아메리칸 스타일>이라는 영화의 배경음악을 담당하면서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이후 데이브 그루신은 재즈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각종 영화와 TV 프로그램을 담당했다.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영화음악가 데이브 그루신 / 출처. IMDb
그가 1967년에 OST를 담당했던 또 하나의 영화는 <졸업>이었다. 사이먼 & 가펑클의 노래가 메인 테마로 등장했던 <졸업>은 아메리칸 시네마의 세대교체를 시도했던 마이클 니콜스가 감독했던 작품이다. 같은 해 북미 지역에서 최고의 흥행 수익을 올린 <졸업> 덕분에 데이브 그루신은 순식간에 주목받는 영화음악가로 발돋움했다. 그는 감각적이면서도 세밀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예술적 재능을 선보였다.
1987년에 GRP 레이블에서 출시했던 앨범 [Cinemagic]은 제목처럼 데이브 그루신이 담당했던 여러 사운드트랙이 등장한다. 영화 <황금연못에서>, <투씨>,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더 챔프>, <콘도르의 3일>은 20세기 후반을 뜨겁게 달궜던 감동적인 작품이다. 만약 데이브 그루신이 없었다면 해당 영화를 감상했던 이들은 지금과는 다른 기억을 간직했으리라. 나는 2019년 서울에서 데이브 그루신 & 리 릿나워의 콘서트를 보았다. 공연 내내 이화여대 리어카에서 건진 백판의 추억이 떠올랐음은 물론이다.
[데이브 그루신 추천 앨범]
1. One Of A Kind, Polydor, 1977년 2. Mountain Dance, GRP, 1979년 3. Night-Lines, GRP, 1984년 4. Harlequin, GRP, 1985년 5. Cinemagic, GRP, 1987년 6. GRP Live In Session, GRP, 1988년 7. Migration, GRP, 198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