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보기 드물게 4부작인 드라마 <죽음은 섬광처럼>은 몇 가지 점에서 ‘뒤집어서 봐야 하는’ 작품이다. 웬일로 짧은 4부작일까. 제목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왜 이런 얘기를 했을까. 실제로 하고 싶었던 얘기는 무엇일까.

4부작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루는 인물, 다루는 소재가 워낙 짧은 기간에 일어난 사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8부, 10부, 12부로 줄줄 늘려서 잡을 만한 얘기는 아니다. 간결하게 정리하고 가야 할 내용이다. 제작진이 4부작으로 결정한 건 매우 현명한 판단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1880년 미국 제20대 대통령에 당선된 제임스 가필드에 대한 이야기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4부를 보고 있으면 이 작품을 만든 맷 로스가 사실은 뭘 얘기하려는지 그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연출이 오락가락했다는 얘기이다. 잘못 만들었다는 것이다.

제목인 <죽음은 섬광처럼> 곧 ‘Death by Lightning’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에밀리 디킨슨의 시 『Because I could not stop for Death』에서 모티프를 얻었을 수도 있겠다. 이 시에는 물론 ‘죽음은 섬광처럼’의 시구가 나오지는 않는다. 다만 디킨슨의 시나 맷 로스의 이 4부작 드라마나 모두 1800년대를 살았거나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그 연관성을 추측해 본다.
넷플릭스 '죽음은 섬광처럼' 스틸 컷.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 역을 맡은 마이클 섀넌. / 사진. © Larry Horricks/Netflix
넷플릭스 '죽음은 섬광처럼' 스틸 컷.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 역을 맡은 마이클 섀넌. / 사진. © Larry Horricks/Netflix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마이클 섀넌)은 재임 기간이 (병상에 누운 기간을 합해도) 단 199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근소한 득표율 차이로(그러나 선거인단 수 차이는 컸다. 뉴욕주에서는 34표로 몰표를 가져갔다) 대통령이 됐고 선거자금으로 빚지는 바람에 공화당 막후 실세 계파의 수장인 로스코 콩클링(셰이 위검), 체스터 아서(닉 오퍼먼)에게 휘둘린다. 이 둘은 뉴욕 세관과 우정국을 장악해 당의 돈줄을 쥐고 있는 인물들이다. 가필드는 정·재계의 부패를 척결하고 싶어 했고 자신도 늪에 빠진 엽관주의, 곧 공화당 내에 만연해 있는 매관매직의 행태를 해체하고 싶어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넷플릭스 '죽음은 섬광처럼' 스틸 컷. / 사진. © Larry Horricks/Netflix
넷플릭스 '죽음은 섬광처럼' 스틸 컷. / 사진. © Larry Horricks/Netflix
가필드는 공화당 내 급진파였다. 링컨주의자이다. 지금과 달리 공화당은 북부 자유무역과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한 진보주의자들의 정당이었고 민주당은 남부의 보수파들을 대변했던 때이다. 그중에서도 급진 공화당원들은 미국 사회, 특히 정치판을 개혁하려 투쟁했던 인물들이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남북전쟁의 영웅인 율리시스 그랜트였다. 급진 공화당원들이 추구하는 이상 중 하나가 흑인 노예의 완전한 해방이었다. 당연히 참정권까지 염두에 둔 조치를 추구했으나 남부의 격렬한 저항과 이를 발판으로 하는 민주당과의 대립, 다른 한편으로는 공화당 내 온건파와의 갈등으로 진척될 수 없었다. (흑인의 참정권은 1880년 수정헌법 제15조 제정으로 흑인 남성에게 공식적으로 부여되었으나 그마저도 남부 지역의 인종차별적 법률과 폭력으로 실질적으로 제한되다가 마틴 루터 킹이 민권 운동을 이끌고 린든 B.존슨 민권법 제정에 서명함으로써 1964년에서야 실현된다) 공화당은 급진파와 온건파 간 싸움으로 분당 직전의 상황으로까지 간다.

<죽음은 섬광처럼>이 초반부에 보여주는 공화당 전당대회는 바로 그 과정을 그린 것이다. 급진 공화주의자였으나 온건파로 기울던, 그리하여 중도 보수 성향을 지닌 가필드가 공화당을 통합할 만한 대안으로 갑작스럽게 떠오른다. 36번의 투표 끝에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영화는 역사책이 아니다. 영화가 공화당 전당대회 이면의 여러 정치적 배경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가필드가 매우 드라마틱한 경로로 대통령이 됐고 그래서인지 추후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주는 것으로 설정의 합리성 정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죽음은 섬광처럼>의 1부는 나름 흥미진진하다. 미국 현대 의회주의의 시초가 어떠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풀 쇼트로 비추는 공화당 전당대회 장면은 역사적 고증(의상, 스타일, 각종 소품의 배치)을 넘어서서 그 안에서 떠들고 규탄하고 주장해대는 당시 정치인들의 모습을 일군의 엑스트라 연기자의 모브씬으로 그럴듯하게 표현해낸다. 미국, 할리우드는 특히 이런 장면을 잘 찍는데 한 프레임 안에 수십 수백 명의 엑스트라를 배치하고 카메라 렌즈는 맨 앞의 주연급 배우들에게 포커스를 맞추되 저 뒤에 있는 사람들까지 연기를 하게끔 하는 것이다. 이런 전당대회를 전체 화면으로 생생하게 찍어 내는 건 아직 할리우드의 솜씨를 따라갈 자들이 없다.
로스코 콩클링 역을 맡은 셰이 위검과 체스터 A. 아서 역에 닉 오퍼먼. / 사진. © Larry Horricks/Netflix
로스코 콩클링 역을 맡은 셰이 위검과 체스터 A. 아서 역에 닉 오퍼먼. / 사진. © Larry Horricks/Netflix
<죽음은 섬광처럼>은 캐릭터 중심의 세 축으로 이야기를 짰다. 먼저 청교도적인 인물 가필드가 한 축이다. 또 인정욕구에 시달리고 허명을 좇으며 정신병적 허언증을 지닌 정치적 그루피인 찰스 기토란 인물(매슈 맥패디언)이 나온다. 그리고 콩클링과 아서 두 인물이 대표하는 정치 깡패들이 있다. 이렇게 세 인물군을 통해 미국의 현대 정치라고 하는 시원(始原)이 얼마나 사악한데다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얼토당토않은 일로 가득했는지를 보여준다. 가필드는 대통령 취임 4개월 만에 찰스 기토가 쏜 총에 어처구니없이 쓰러진다. 기토는 자기가 프랑스 영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밀어준다고 착각하는, 아서 체스터 같은 인물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서 체스터는 가필드가 어쩔 수 없이(선거자금 때문에) 러닝메이트로 지명해 부통령이 된 상태다. 대통령 유고 시에는 부통령이 권력을 승계한다. 찰스 기토가 노린 것은 바로 그 점이다.

4부작 <죽음은 섬광처럼>은 대통령 가필드가 살해되기까지의 에피소드를 착착 쌓아 나가고 척척 진행해 나간다. 이야기의 축조 방식과 속도, 리듬감이 정통이다. 착실하게 연출을 연마한 솜씨다. 결국 가필드의 짧았던 재임, 미완성의 급진주의자의 삶을 통해 지금의 미국 사회를 은유하고 싶어 했음을 알게 된다. 정치가 돈(뉴욕 세관 수입)에 좌지우지되고 가짜 생각(가짜 뉴스)에 빠진 미치광이가 날뛰면 사회는 결국 퇴보하게 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죽음은 섬광처럼>은 결국 미국 현대 정치를 위한 생생한 역사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그런데 교과서와 달리 매우 재미있다. 연기들을 너무나 잘한다. 마이클 섀넌은 인생 연기를 선보이고 영부인 역의 베티 길핀(세상에, 2020년 작 <헌트>에서 그 살벌한 킬러 역 여배우)은 모두의 기억에 인장을 찍는 연기를 해낸다. 부통령 아서 체이스 역의 닉 오퍼먼이 기른 그 구레나룻이란.
닉 오퍼먼의 구레나룻. / 사진. © Larry Horricks/Netflix
닉 오퍼먼의 구레나룻. / 사진. © Larry Horricks/Netflix
찰스 기토를 연기한 매슈 맥패디언. / 사진. © Larry Horricks/Netflix
찰스 기토를 연기한 매슈 맥패디언. / 사진. © Larry Horricks/Netflix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4부작 <죽음은 섬광처럼>에서 감독 맷 로스가 주목했던 인물, 정말 부각하여 드러내고 싶었던 사람은 영부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당당한 여성으로서의 루크레시아 가필드였던 것 같다.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였던 루크레시아는 남편의 정치 활동에 조력자로(연설문 조정, 정책 결정, 인사에 영향) 기록되어 있기도 하지만 영화에서는 가필드가 전적으로 의존했을 만큼 가장 중요한 존재로 묘사된다. 가필드가 아내인 루크레시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난 당신 없이는 안돼.” 가필드가 총에 맞아 죽어 갈 때 그의 곁으로 달려 온 루크레시아는 말한다. “당신을 어쩌면 좋아. 일주일을 떠나있지 못하게 하네”. 그 로맨스가 따뜻하다.

드라마 <죽음은 섬광처럼>은 미국 현대 정치의 그늘에 얼마나 위대한 모성의 여성성이 자리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바로 그 점이 좋다. 여성성의 복원은, 곧 여성성의 전면 배치는 현대사회를 고쳐가는 신약이 될 수 있다. 가필드가 죽어가는 2개월여의 투병 과정에서 보이는 두 연인의 밀어가 일품이다. 이런 식의 신파도 할리우드가 잘 찍는다. <죽음은 섬광처럼>은 역사 속에서 잊힌 가필드란 인물로 시작해 역사의 유적지에서 새로 발굴된 루크레시아로 끝낸다. 함의하는 바가 크다. 정주행의 시청을 권하는 바이다. 깨달음은 늘, 섬광처럼 오는 법이다.
루크레시아 가필드를 연기한 베티 길핀과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 역을 맡은 마이클 섀넌. / 사진. © Larry Horricks/Netflix
루크레시아 가필드를 연기한 베티 길핀과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 역을 맡은 마이클 섀넌. / 사진. © Larry Horricks/Netflix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