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을 나설 때면, 버스보다는 기차를 선호한다. 출발 전 기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차창 밖 풍경을 내다볼 여유가 생기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필요하다. 차창 밖으로 움직이는 풍경이 내가 어디론가 가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창 프레임을 화면 삼아 선로 변 도열한 가로수, 전력선, 탑, 구조물들이 교대(Alternation)로 등장하고 사라진다. 빠른 속도로 점등과 점멸을 거듭하는 (On/Off) 반복을 응시하다 보면, 마음속에 박(拍)을 세게 된다. 움직이는 것은 나인 줄 알면서 마치 정지 화면을 이어 붙여 움직임을 만드는 모션그래픽을 볼 때처럼 몸과 마음이 출렁출렁한다. 그것을 여행의 설렘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 망막에 비친 일종의 규칙적인 반복(예: 스트로브 깜박임)이나 반복 자극이 활성화되거나 감소할 때면, 우리의 감각이 왜곡된다. 기하학 형태와 미묘한 색채 관계, 원근법 등을 이용하여 사람의 눈에 착시를 일으키는 옵아트(Optical Art)나 멜로디의 높낮이와 길이를 달리한 음악은 같은 원리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움직인다. 음악, 미술 모두 결국 에너지와 같은 주파수와 진동의 조화로 우리의 감정과 신체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예술이 아닌가. 이처럼 요즘 예술은 하나의 감각에 의지하지 않고 여러 감각, 기술, 재료를 섞고 나아가 예술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재정의하려는 시도가 유독 많다.
이처럼 문보리의 직조는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최첨단 예술처럼 보이지만, 발상과 작업방식은 무척이나 아날로그적이다. 직조의 짜임은 어떤 실을 어떤 방식으로 엮는가에 달려있다. 그래서 작가(weaver)는 늘 새로운 실과 독자적인 직조법을 찾고 개발하는 데 지대한 관심이 있다. 화학사(귀반사실, 광섬유 등)를 위주로 사용하던 작가는 근래 삼실, 모시, 명주 등 우리나라의 천연섬유에 관심을 가지며 안동, 문경 등지를 다니고 있다. 인견사, 모시실, 삼실(삼 껍질에서 뽑아낸 실) 등 천연사는 마치 올리브유나 와인의 풍미처럼 산지, 수확한 원물의 시기, 기후에 따라서도 매때 특질이 다르므로, 직조 전 사용하려는 실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특히 천연사와 합성사를 함께 직조할 때는 지름, 광택, 부피, 마찰력, 방적성이 다르므로 서로 간 조화시킬 방법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오래 작업할수록, 원하든 원치 않든 작가의 몸에는 태피스트리로 살아온 자만이 지닐 수 있는 특유의 리듬과 감각이 스미게 마련이다. 작가의 몸뿐 아니라 작업실 공간 속에 함께한 모든 것에 스민다. 그것은 잊히지도 쉽게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업을 통해 후천적으로 획득한 감각이고 한 인간 삶의 태도로 정착되는 것이다. 작업실 바깥에서 작가가 세상 그리고 무수한 타자들을 만날 때도 불현듯 발휘되고 작동된다.
문보리의 직조 부조 세부. 파도가 해안으로 차곡차곡 밀려와 쌓이듯, 산이 겹겹이 도열하듯 작가가 이중직으로 짠 삼각 열주도 빛과 다양한 각도로 만나 빛을 품는다. / 필자 제공
빛나는 광섬유들은 작가가 입력한 프로그램에 따라 저 홀로 혹은 관객의 맥동과 연동하며 반짝이고 꺼진다. 빛이 보내는 신호를 모스부호처럼 마음으로 세며 작가가 자신의 생 어느날에 경험했을 풍경, 소리, 울림을 상상해본다. / 필자 제공
문보리의 감각과 태도는 어느 날 대구에서 안동으로 삼실을 구하기 위해 탑승했던 기차 밖 풍경을 내다보거나, 그 옛날 수없이 탄(炭)을 싣고 번성했을 문경 폐역의 적막한 풍경을 마주했을 때도 동(動)했다. 작가의 ‘체화된 인식(embodied cognition)'은 이 복잡계와 마주한 순간에도 어김없이 세계의 의미를 찾아낸다. 자연과 무수한 존재들이 내는 소리가 파동의 형태로 생성되고 요동치는 세계 속에서 나의 주파수로 찾아낸 감응 동기-포착의 순간, 화가는 붓으로, 작곡가는 음악으로, 안무가는 춤으로 자신의 특화된 감각으로 세계를 표현하겠지만, 직조가 문보리는 직조기에 앉아 터득한 감각과 리듬으로 자신이 마주한 세계로부터 들려오는 보이지 않는 리듬과 소리를 씨실과 날줄의 언어와 무수한 짜임, 색으로 표현해 보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가장 잘하는 것, 나의 언어, 나만의 맥동, 세계를 대하는 나의 태도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