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 나는 검은 피부의 여인들을 화폭에 담아 적극적으로 브라질을 나타낸 화가가 있었다.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의 후예 국가들인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가 식민주의를 청산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인디오와 백인의 혼혈인 ‘메스티소’를 대표 인종으로 삼았듯, 이 브라질 화가를 관통하는 가장 광범위한 주제는 ‘아프로-아메리칸’ 여성(물라타)이었다. 파시스트 전체주의 정권이 옹호하는 순수 인종 운운의 인종차별적 이데올로기 시기에, 그의 작업은 다양성이 있는 브라질의 가치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 브라질에서 물라토, 물라타라는 용어는 경멸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가 그려내는 혼혈 여성들은 물론 관능적이다. 이것이 오늘날 여성의 대상화라는 비판에 직면한 것도 사실이지만 예술가로서 그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20세기 초중반의 남미라는 역사적 시공간의 맥락을 파악할 때만 그는 온전히 평가될 수 있다.
[좌] 디 카발칸티 <물라타> (1952) / 사진=필자 제공,  [우] 디 카발칸티 <초록 배경의 물라타> (1963) / 사진출처. © 상파울루 미술관(MASP)
[좌] 디 카발칸티 <물라타> (1952) / 사진=필자 제공, [우] 디 카발칸티 <초록 배경의 물라타> (1963) / 사진출처. © 상파울루 미술관(MASP)
이탈리아계로 리우데자네이루 출신인 에밀리아노 아우구스토 카발칸티 데 알부케르케 멜로는 ‘디 카발칸티’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캔버스 작업 이전에 캐리커쳐 작가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을 시작했고, (1914년 리우데자네이루) 잡지에 삽화와 표지를 그렸으며, (1917년 상파울루) 남미 참여 미술 전통에 합류한 벽화가이기도 했다. 브라질 근대 미술계에서 몇몇 예술가들은 개별 이름이면서 동시에 집합체로 이해해야 마땅한데, 이는 20세기 초, 서구나 북미에 비해 명백한 후발 주자라 할 수 있었던 브라질의 ‘근대’에 걸맞은 미학의 확립은 일군의 사람들이 시대정신으로 의기투합해 이룬 것이어서다. 디 카발칸티가 이주했던 상파울루라는 도시의 문화적 활기와 아니타 말파티(1889~1964)의 전시회가 던진 도전적 명제는 그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시작했다가 멈춘 본격적인 회화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했다.

유럽 모더니즘 회화의 최신 경향을 흡수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선보였던 아니타 말파티는 정작 아카데미즘에 물든 평단의 혹평에 크게 좌절하고 창조력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 역설적으로 말파티의 전시회를 통해 마리우 지 안드라지, 오스바우지 지 안드라지, 길레르미 지 알메이다 등 지식인 그룹을 중심으로 타르실라 두 아마라우, 포르티나리 등이 의기투합하면서 1922년 ‘현대미술주간’이라는 기념비적인 전시가 이루어져 이를 바탕으로 브라질 예술운동의 방향성이 확립된다.

바로 이 ‘현대미술주간’을 위한 기념비적인 카탈로그와 포스터를 디 카발칸티가 그렸다. 이듬해인 1923년 그는 파리로 가서 랑송 아카데미에 다녔고(공식적으로는 신문 <코헤이우 다 마냐>의 특파원 신분이었다), 카페, 매음굴, 기타 파리의 밤 문화에 뿌리내린 보헤미안 생활을 경험했다. 파리 거주는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페르낭 레제, 앙리 마티스 등 중요한 현대 화가들과 접촉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들로부터 흡수한 입체파, 야수파, 초현실주의의 영향은 그의 작품에 매우 개인적인 언어로 새겨졌다. 디 카발칸티는 1925년에 브라질로 돌아왔다.
1922년 현대미술주간 카탈로그 표지 / 사진출처. © Artsoul / artsoul.com.br
1922년 현대미술주간 카탈로그 표지 / 사진출처. © Artsoul / artsoul.com.br
그는 회화에서 색채를 더욱 강조하며 팔레트의 가용 범위를 넓혔다. (강한 색채 대비는 직관적으로 남미적 요소로 볼 수도 있다) 특히 피카소의 영향력은 인물의 방대하고 기념비적인 크기, 혹은 인물의 손과 발에 대한 묘사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곡선적인 형태를 즐겨 사용하고 다양한 붉은색 음영을 시적으로 표현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춘다. 작품 <삼바>(1925)와 <과라팅게타의 다섯 소녀들> (1930)에서 입체파와의 미묘한 대화가 특히 잘 드러난다. 인물들의 부피감, 해부학적 불균형, 곡선형 특징과 왜곡된 원근법 등이 두드러진다.
[좌] 디 카발칸티 <삼바> (1925) / 사진출처. © Artsoul / artsoul.com.br  [우] 디 카발칸티 <과라팅게타의 다섯 소녀들> (1930) / 사진출처. © Artsoul / artsoul.com.br
[좌] 디 카발칸티 <삼바> (1925) / 사진출처. © Artsoul / artsoul.com.br [우] 디 카발칸티 <과라팅게타의 다섯 소녀들> (1930) / 사진출처. © Artsoul / artsoul.com.br
‘현대미술주간’(1922) 행사에 뜻을 같이 했던 모더니즘의 투사들과 디 카발칸티가 구별되는 지점이 있다. 그의 아버지가 언론인으로 노예제 폐지론자였던데다 작가, 예술가들과의 폭넓은 교류로 어린 디 카발칸티의 감수성 구현에 영향을 미친 면이 있지만, 그의 동료들이 대부분 (부모가 커피 농장주라던가 하는 식으로) 돈 걱정 없이 예술가로 활동할 수 있는 부류였던 데 반해 디 카발칸티는 상대적으로 물질적 여유가 없는 축에 속했고 어린 시절부터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다. 즉 그는 계급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공산당원이었고 파업과 노조 행사에 참여했으며 정치 활동으로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 그의 그림 또한 노동계급과 관련된 것들이 많았다. 그는 이런 유의 정치 활동을 한 최초의 모더니스트였다. 캔버스 작업을 활발히 하던 시기에도 디 카발칸티는 풍자만화와 비평 드로잉을 계속 그렸다. 예를 들면, 브라질의 각종 자산을 외국 자본에 매각하는 주제가 등장하는 것이다.

압축된 근대화의 과정을 겪어내야 하는 브라질의 예술가로서 디 카발칸티는 고뇌했던 것 같다. 1930년대에 그는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당의 교리에 대한 의문에 잠겨 있었다. 세부 사항은 이렇다. 가령, 모더니스트 예술가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는 한편, 화가 노에미아 무랑과 결혼했고 당시 군국주의를 풍자한 드로잉 시리즈인 <브라질의 현실(A Realidade Brasileira)>을 출판했으며 공산주의 운동에 맞춰 수십 편의 정치 만화를 제작했다. 1936년엔 바르가스 정권의 탄압을 피해 파리에 다시 머물렀는데 재정적 어려움에 빠졌던 이들의 생활은 파리 살롱에서 좋은 평가를 얻었던 노에미아가 책임졌다. (무랑은 그러나 브라질 귀국 후 빠르게 잊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치가 프랑스를 침공하자 일련의 정치 투쟁에 지쳐버린 그는 브라질로 다시 돌아왔으며(1940) 이후 가톨릭 신앙에 잠깐 경도되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1945년엔 다시 가톨릭을 버리고 공산당과의 협력을 재개했다. 파블로 네루다를 자택에서 접견하기도 했다.

“현대의 사회적 위기는 예술가들을 분열시킬 것이다. 한편으로는 유토피아적이고 형식적으로 멸균된 추상주의가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리얼리즘이 있을 것인데, 리얼리즘은 역사적 풍요로움, 이성의 확실성, 그리고 인간 이해의 힘을 지니고 있다.”
디 카발칸티 <노에미아> (1932) / 사진=필자 제공
디 카발칸티 <노에미아> (1932) / 사진=필자 제공
‘현대미술주간’을 주도한 모더니스트 중 한 명이었으나, 어느 시점부터는 예술적 전위를 부인했다는 점에서 디 카발칸티는 어떤 모순점 하나를 명확히 보여준다. 아니, 20세기 전반의 혼란스러운 이념 지도가 그의 몸에 새겨져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추상주의를 위험하게 보고 구상 미술을 열렬히 옹호했던 그는 1948년 상파울루 현대미술관(MAM/SP)에서 『근대주의의 신화들』이라는 강연을 열었고, 그 내용은 『리얼리즘과 추상주의(Realismo e Abstração)』라는 글로 발표되었다. 그는 예술을 사회적 참여의 한 형태로 이해했기에 현실적인 주제가 중요했으며, 혼혈 여성이나 카니발, 노동자, 삼바 무용수 등은 그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주제들이었다.
노에미아 무랑 <두 소녀가 있는 바다 풍경> (1937) / 사진=필자 제공
노에미아 무랑 <두 소녀가 있는 바다 풍경> (1937) / 사진=필자 제공
1950~60년대에 그는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베니스 비엔날레를 통해 다양한 지역 대중들과 소통했고, 오스카르 니에메예르의 요청으로 브라질리아 하원을 위해 식민지 개척자들의 도시 도착을 묘사한 패널 <칸당고스>(1960)를 그렸다. 기하학적 형태와 원근법의 부재에서 입체파 영향을 관찰할 수 있는 작품이다. 또 다른 벽화 <나비오 네그레이로>(1961)는 삼부작 형식으로 전시되어 브라질 식민지 시대를 다룬다.

“디 카발칸티는 브라질 회화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다. 어떤 민족주의적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도, 항상 민족적 대상을 가장 정확하게 그렸다. 그는 브라질을 풍경화와 혼동하지 않았고, 슈가로프 산 대신 삼바를 주제로 한 캔버스를 그렸으며, 코코넛 나무 대신 혼혈인, 흑인, 카니발을 묘사했다. 그는 우리 사회의 이면을 풍자하는 작가이며 파티의 사랑스러운 이야기꾼이었다.”
-마리우 지 안드라지
디 카발칸티 <칸당고스> (1960) / 사진=필자 제공
디 카발칸티 <칸당고스> (1960) / 사진=필자 제공
서정 에세이스트•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