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이에 1980년대부터 클래식 매니아로 살았지만,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을 2년에 한 번씩 서울에서 들을 수 있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1956년 12월생이니 머지않아 그의 나이 일흔. 볼 수 있을 때 후회 남지 않게 자주 봐둬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무리한 퇴근을 감행하여 목요일의 롯데콘서트홀로 달렸다. (7시 반 공연은 아무래도 직장인에겐 너무 빠르다.)
청년 시절엔 쇼팽이 환생한 듯한 모습이더니, 근년에 무대에 나서는 지메르만은 갈수록 브람스를 닮아간다. 2년 전에 본 내한 리사이틀 때보다 더 배가 나온 듯했다. 그 모습에 어울리는 묵직한 터치로, 드뷔시의 전주곡집 1권 제10번 ‘가라앉은 대성당(La cathédrale engloutie)’ 연주를 시작했다.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2026 리사이틀 / 사진제공. 마스트미디어
이번 리사이틀 프로그램은 다장조로 시작한 1부가 12곡, 올림다단조로 끝난 2부가 12곡, 합해서 24곡이었다. 전체를 하나의 전주곡집이라는 개념 아래 구성한 것으로 보였다. 쇼팽, 시마노프스키, 바체비치 (이상 3명은 폴란드 작곡가), 드뷔시, 라흐마니노프, 스크랴빈, 카푸스틴, 포레, 바흐, 거슈윈의 전주곡들을 섞어 배열했다. 같은 작곡가의 전주곡을 두 곡 이어서 연주한 건 쇼팽 빗방울 전주곡과 그다음 곡(Op.28의 15와 16번), 한 번뿐이었다.
묵직한 곡과 가볍게 찰랑이는 곡, 위트있고 유쾌한 구석이 있는 곡과 멜랑콜리 속에 침잠하는 곡이 다양하게 섞였다. 하나의 전주곡이 그다음 전주곡(前奏曲)을 위한 전주곡(Prelude)이 되는 구성이었다. 지메르만은 이 곡 뒤에 왜 이 곡을 놓았을까. 때로는 알쏭달쏭했고 때로는 알 것 같았다. 어느 대목에선 앞 곡의 심상을 이어갔고, 어느 대목에선 앞곡의 잔상을 산뜻하게 지워 코스의 방향을 틀었다. 그가 주도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나하나 소리의 맛을 보아가는 과정은 마치 스시 장인의 오마카세를 경험하는 것과 비슷했다.
스시 오마카세로 비유하자면, 이날의 주재료는 아마도 파브리니(Fabbrini) 피아노가 아니었을까. 최고의 선장이 잡아 보낸 제철 생선 특상품에 최고의 셰프가 손맛을 가해 극한의 맛을 끌어내는 것처럼, 지메르만의 손길은 파브리니가 빚어낸 스타인웨이 사운드를 극한으로 끌어올려 요리했다. 스시 장인이 하나의 맛 위에 다른 맛을 쌓고 그 뒷맛의 연장선에서 다음 한 점을 내놓듯, 지메르만도 그렇게 자신의 피아노 소리를 요리해 나갔다. 나 또한 장인의 스시를 맛보는 식객의 심정이 되어, 지메르만이 피아노의 단맛을 어떻게 끌어올리고 산미와 짠맛, 녹진한 맛을 어떻게 활용해 두 시간 짜리 코스를 내놓는지 세세하게 분별해보려 애썼다.
건반이 눌릴 때의 소리와 감촉, 터치의 무게 변화, 피아노의 현이 울면서 공기중에 물결처럼 번져 나가는 진동… 이런 것들을 음미할 시간이 충분한 곡들이 가장 인상 깊었다. 이를테면 1부 첫 곡인 드뷔시의 ‘가라앉은 대성당’, 6번째로 연주한 바체비치(Bacewicz)의 전주곡과 푸가 f단조(피아노소나타 2번 중) 같은 곡이 그랬다. 후반부 끝 곡인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2번 Op.3-2 ‘종소리’ 또한 피아노의 ‘울림’을 느끼기 좋은 곡이었다. 그런 점에서, 프로그램 전체가 수미쌍관 구조였다고 할 수도 있겠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연주의 기술적 측면과 체력적 측면에선 아무래도 쇠퇴의 기미가 조금씩 느껴졌다. 쇼팽 빗방울 전주곡에 이어서 나오는 바로 다음 곡(Op.28-16)처럼 격렬하고 빠른 곡은 덜 명료하고 다소 어수선하게 들렸다. ‘5년만 젊었어도 저렇지 않을 텐데…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스트레스 받겠지’ 싶어 마음이 짠했다. 다행인 것은 나도 같이 늙어간다는 점이다. 노(老)대가들의 연주를 듣는 내 마음에 이해의 폭이 커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스포츠에는 이런 말이 있다.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 하물며 스포츠가 아닌 음악 연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지메르만이 자신만의 피아노로 빚어내는 음악의 광채는 그의 손과 얼굴에 늘어날 주름살로 가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도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연주 시작 전부터 피아노 왼편에는 검은 천을 씌운 원탁(?)같은 물체가 있었다. 말을 할 때를 대비해 마이크를 올려놓을 탁자일까? 가습기나 난로 같은 것일까? 모두가 궁금해했는데, 인터미션 때까지도 그 물건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건 작은 북이었다. 2부 첫 곡인 드뷔시 전주곡집 1권 12번 ‘민스트렐’ 연주 중에 그는 잠깐 몸을 왼쪽으로 돌려 피아노 건반 대신 그 작은북을 쳤다. 악보의 해당 부분에서 작은 북 소리를 연상하는 것과 실제 연주에서 한 소절을 작은 북 연주로 대체하는 건 다른 문제다. 게다가 그 작은북을 검은 천으로 덮어놓은 고민과 위트라니.
연주를 마친 지메르만은 기분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앵콜곡은 (내가 처음에 그의 모습을 보고 브람스를 연상했기 때문에 그랬는지 몰라도) 브람스인가 했는데, 슈만의 로망스 2번(Romance No. 2 in F sharp major, Op. 28)였다. 지메르만이 이날 들려준 좋은 부분들을 응축해 놓은 것 같은 소품의 아름다운 연주였다. 마지막 음이 사그러짐과 동시에 지메르만은 피아노 뚜껑을 닫았다. 우뢰와 같은 박수를 뒤로하고 들어간 뒤엔 다시 나오지 않았고, 바로 전체 조명이 켜졌다. 지메르만다운 엔딩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