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나의 아저씨'·'시그널' 등 만든 이항 미술감독 인터뷰
'형사록' 미술감독 "화면 너머로 냄새까지 전달하고 싶었죠"
"초반에 연출팀이랑 한 얘기가 '기존 드라마에서 작업해보지 못했던 극단까지 가보자'였어요.

화면 너머로 오감을 자극하고 싶었죠."
형광등 전등 몇 개가 빛을 밝히는 한 고시원 복도. 천장 쪽 벽에는 곰팡이가 피어있고, 그나마 비교적 최근 칠한 듯한 페인트도 습기를 이기지 못해 벗겨져 있다.

노후한 건물의 흔한 풍경처럼 보이지만,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형사록' 속 '노을 고시원'의 특이점은 바로 복도의 너비에 있다.

'형사록' 속 공간을 창조해낸 이항 미술감독은 최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연출과 상의 끝에 복도의 폭을 세 번에 걸쳐 조정했다"며 "노을 고시원의 복도는 평균적인 고시원 복도의 넓이에 비해 약 20cm 좁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형사록' 미술감독 "화면 너머로 냄새까지 전달하고 싶었죠"
두 명이 동시에 지나기에는 좁아서 어쩔 수 없이 서로 어깨를 부딪칠 수밖에 없는 '불편한 복도'를 의도적으로 만든 이유가 뭐였을까.

이 감독은 "사람을 스쳐 지나갈 때 술 냄새, 담배 냄새, 땀 냄새 등 후각적인 자극이 자연스럽게 연상 된다"며 "복도의 폭을 좁히고, 인물 간 접촉을 늘려서 공간 특유의 냄새를 강조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고시원이 크지는 않지만, 화면에 비쳤을 때 냄새, 습도, 소품의 질감 등이 상상되는 공간을 만드는 게 목표였어요.

특히 항구 도시 배경의 건물에서 날 법한 냄새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데 많이 집착했죠."
'형사록' 미술감독 "화면 너머로 냄새까지 전달하고 싶었죠"
현실감을 살린 디테일이 숨어있는 또 다른 공간은 고시원 식당이다.

주인공인 김택록(이성민 분)이 러닝셔츠 바람으로 라면을 끓여 먹으러 자주 찾는 이 공간에는 공용 냉장고 옆에 벽을 튼 흔적이 남아있다.

이 감독은 "원래는 더 좁은 공간이었는데, 점점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테이블을 늘리기 위해 벽을 텄다는 설정을 입혔다"며 "사람들이 실제로 오랜 기간 동안 살아온 공간처럼 보이도록 하는 게 목표였다"고 설명했다.

"예쁜 공간을 만드는 것보다도 실제로 누군가 살 법한 공간이라고 설득되는 공간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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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록' 미술감독 "화면 너머로 냄새까지 전달하고 싶었죠"
1992년 KBS 아트비전에 입사해 사극 '장희빈'(2002)으로 데뷔한 이 감독은 '하얀거탑'(2007), '미생'(2014), '시그널'(2016), '나의 아저씨'(2018), '60일 지정생존자'(2019), '아스달 연대기'(2019) 등 작품들 속 세계관을 구현해왔다.

사극부터 메디컬 드라마, 오피스물, 정치물, 판타지, 형사물까지. 장르를 가르지 않고 30년이 넘도록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며 달려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호기심이었다.

이 감독은 "미술 감독들은 늘 새로운 작품 속 새로운 공간을 만나게 되기 때문에 매번 새롭다"고 했다.

그는 "경력이 길더라도 새로 배워야 할 것들이 태산"이라며 "배우들이 맡은 배역이 돼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보듯이, 저도 캐릭터들이 살아온 공간을 상상하고 디자인하면서 호기심을 채운다"고 웃음을 지었다.

'형사록' 미술감독 "화면 너머로 냄새까지 전달하고 싶었죠"
이력으로 짚을만한 대표작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이 감독은 "제 대표작은 현재 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형사록'이라고 답하겠다"고 말했다.

"과거에 어떤 작품을 만들었고, 몇 개 작품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과거를 떠올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요.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현재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바빠요.

(웃음)"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