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노딜 이후 고립적 국가주의 강화…개방적 태도 필요

[장용훈의 한반도톡] 애국가 제창·대형 인공기…김정은의 '국가제일주의' 한계
북한에서 김정은 시대 들어 가장 두드러진 변화 중 하나는 '국가'의 부상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 국가제일주의'가 새로이 등장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정세와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우리 국가제일주의를 신념으로 간직하고…세대를 이어 지켜온 소중한 사회주의 우리 집을 우리 손으로 세상에 보란 듯이 훌륭하게 꾸려나갈 애국의 열망을 안고 성실한 피와 땀으로 조국의 위대한 력사를 써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신년사 이후 '우리 국가제일주의'는 북한에서 가장 중시되고 많이 사용되는 모토가 됐다.

주요 계기마다 치러지는 대규모 열병식 중계에선 대형 인공기가 내걸리고 다같이 무반주로 애국가를 제창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인공기 문양으로 디자인한 옷이 유행했고, 국조(國鳥)는 참매에서 까치로 바뀌었다.

'국력', '애국'이라는 단어가 관영매체에서 더 자주 눈에 띄는 것도 국가제일주의 주창 이후 변화상이다.

'국가'라는 개념은 김정일 시대만 해도 북한에서 흔히 사용되지 않았다.

왜 김정은 위원장은 국가를 꺼내 들었을까.

김 위원장에게 있어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물려준 북한은 항상 한미의 군사적 위협에 시달리고 경제적 어려움을 중국과 남한 등 외부의 도움으로 해결하는 나라였다.

국제사회에서 '코리아'는 '사우스 코리아'만 인정받고 '노스 코리아'는 말썽꾸러기 악당으로 여겨졌다.

유년기를 스위스에서 공부하며 '외국물'을 먹은 김 위원장에게 이런 상황은 정상적이지 않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국가제일주의'를 앞세워 스스로 안정을 만들어가는 나라를 꿈꾼 것으로 보인다.

[장용훈의 한반도톡] 애국가 제창·대형 인공기…김정은의 '국가제일주의' 한계
그는 특히 군사 부문에서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에 주력했다.

재래식 무력의 비대칭 상황을 일거에 해소해, 그들이 말하는 군사적 안정을 확보하는 차원에서였다.

김 위원장이 그해 신년사에서 "강력한 자위적 국방력은 국가존립의 초석이며 평화수호의 담보"라며 "나라의 방위력을 세계선진국가 수준으로 계속 향상시킬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정치적으로는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유명무실해진 노동당의 기능을 되살리고 정책결정에 있어선 다양한 회의를 거치면서 프로세스를 복구했다.

경제적으로는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는 나라를 그렸다.

신년사에서 김 위원장은 "우리 국가는 그 어떤 외부적인 지원이나 그 누구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능히 우리 인민의 억센 힘과 노력으로 우리 식 사회주의발전의 길을 따라 힘차게 전진해 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실 '국가제일주의' 슬로건을 내건 2019년 새해벽두만 해도 김 위원장은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한 해 전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사상 첫 북미정상회담으로 '정상국가 지도자' 이미지를 누렸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또 한 번의 '세기의 담판'을 앞둔 때였다.

그는 1월말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을 '미국의 심장' 워싱턴D.C로 보냈으며, 백악관에서 그를 맞이한 트럼프 대통령은 "2월말 김 위원장과 만나길 고대한다"고 화답했다.

중국이 미국과 관계개선을 통해 현재의 중국이 가능했던 것처럼 북미관계를 풀어야 보다 나은 북한의 미래가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김 위원장 입장에서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은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결국 김 위원장은 빈손으로 하노이에서 돌아와야 했고, 그 이후로 북한의 국가제일주의 전략은 자력갱생과 폐쇄성을 강화한 고립주의 노선이라는 샛길로 빠져들었다.

외교의 문을 닫아걸고 스스로를 지킬 군사적 억제력 개발에만 올인하면서 주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는 식의 애국주의를 주입하며 통제를 강화한 것이다.

때마침 찾아온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국경봉쇄를 더욱 용이하게 해, 그로선 주민 통제의 고삐를 쉽게 죌 수 있었다.

[장용훈의 한반도톡] 애국가 제창·대형 인공기…김정은의 '국가제일주의' 한계
김정은 시대의 국가주의는 북한의 대남전략도 변화시키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중재로 북미정상회담의 장이 열렸지만, 빈손으로 돌아온 하노이 정상회담 이후 김 위원장은 남북관계에 대한 기대를 접은 듯하다.

그러면서 북한은 남북관계를 통일로 가는 과정 대신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설정하는 모양새다.

남북한의 경제력 격차와 비대칭적 군사력, 국제무대에서 차지하는 외교적 비중 등을 고려할 때 더는 남한을 통일의 대상으로 설정하기 어렵다는 북한의 현실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2021년 제8차 노동당대회에서 당 규약을 개정하면서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 혁명과업 수행" 문구를 삭제하고 "공화국 북반부에서 부강하고 문명한 사회주의 사회 건설", "전국적 범위에서 사회의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발전을 실현" 등의 문구를 새로 넣었다.

사실상 적화통일노선을 포기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유엔 동시 가입국으로서 남한을 수많은 국가의 하나로 여기고 상황에 따라 친소의 정도를 조정해 가는 대상으로 규정짓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김 위원장의 고립적 국가주의가 바람직한 결과물로 이어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중국이나 베트남 등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하던 국가들이 성공적으로 국제사회 구성원이 되고 경제발전을 달성할 수 있었던 데는 보다 나은 국가건설을 위한 개방적 태도가 있었다.

현재는 미중갈등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중국, 러시아가 북한의 기댈 언덕이 되고 있지만, 정세는 가변적이고 이런 구도는 지속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