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회담 사료] '평양 비밀방문' 이후락, 김일성 동생에 "안 온다 생각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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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올 줄 알았습니다" 응수…'상부의 뜻 받들어' 7·4공동성명 서명
남북 핫라인 72년 4월 첫 개설, 4년4개월간 본통화 238회 시험통화 1천108회 1971년 11월 2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 열린 남북 비밀접촉은 분단 후 남북 당국 간의 첫 공식 회담이다.
하루 전 열린 남북적십자회담 예비회담에서 우리 측이 제안해 성사됐다.
그보다 10년 전인 1961년 우리 군이 영관급 장교를 북한 용매도에 잠입시켜 비밀접촉을 타진한 일이 있었으나 공식적인 회담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6일 통일부가 공개한 남북회담문서를 보면 비밀접촉 1차회의에서 북측 실무자(김덕현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직속책임지도원)는 "요즘 세계를 협상의 시대라고 하든가요"라고 운을 띄우자 남측 실무자(정홍진 남북회담사무국 회담운영부장)가 "하기야 주먹으로 하려는 것보다 말로써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어요"라고 화답했다.
총 11차례 실무자 비밀접촉과 서울·평양 교환 방문을 거쳐 박정희 정권의 실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평양 방문이 확정됐다.
분단 27년 만에 시도하는 '적지' 방문인 만큼 고위급·실무자는 상호 방문 때 '상부'의 신임장을 휴대했으며 상대방으로부터는 신변안전보장각서를 받았다.
상대방에게 신변안전을 보장하고 회담 첫 전체회의에서 신임장을 교환하는 절차를 거치는 형식은 지금까지도 남북회담의 관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평양 방문 당시 이 부장은 대화 상대이자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명한 신변안전각서를 받았다.
당시 이 부장이 비장한 각오로 청산가리를 지니고 방북길에 올랐다는 일화는 본인의 후일담과 김종필 전 총리 등의 회고록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이 부장은 평양 주암 초대소에서 열린 김 부장과 1차 회담에서 "(남북 간) 인위적 장벽을 제거하는 시발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해 "친한 친구도 말렸지만" 방북길에 올랐다면서 "솔직히 말해서 내가 안 오리라 생각했지요?"라고 물었다.
김 부장은 "나는 오리라 생각했습니다"고 맞받으며 "'시작이 반'이라고 우리가 마주 앉으니 절반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고 답했다.
북한은 곧바로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제안하며 남측을 압박했다.
김 부장은 "이 부장과 내가 정치협상을 하고 있는 만치 이 급에서 내려가지 말고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만 단번에 해결된다"며 "우리의 정치협상은 우리당 총비동지(김일성)와 박 대통령 간에 정치협상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이 부장은 "처음부터 김 수상과 박 대통령이 회담을 하면 잘못될 경우 실망이 크게 된다.
통일이 궁극적으로 이뤄질 때 김 수상과 박 대통령의 회담이 있어야 한다"며 반대하고, "단계적인 방법을 제안"했다.
북측이 최고지도자간 협상으로 남북문제를 일시에 해결하는 톱다운(top-down·하향식) 방식을 제기하자 남측은 낮은 급에서 신뢰를 쌓아가며 문제를 단계적으로 풀어가는 보텀업(bottom-up·상향식) 방식으로 맞선 셈이다.
회담이 전개되는 내내 입장차를 좁히진 못했지만 남북은 '조국통일 3대 원칙'에 합의해 '7·4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해 통일정책의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남북은 ▲ 외세 간섭 없는 자주 통일 ▲ 무력 사용을 배제하는 평화통일 ▲ 사상·이념·제도를 초월한 민족의 단결 도모를 조국통일 3대 원칙으로 제시했다.
7·4 남북공동성명의 서명자는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이후락 김영주'로만 표시돼 있다.
당국 간 합의문서이긴 하나 서로를 정부로 공식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기관이나 직함 없이 고위급의 이름만 쓴 것이다.
남북회담문서에 손으로 결재 칸을 그려 대통령, 국무총리, 외무장관, 법무장관이 서명 또는 날인한 것도 눈에 띈다.
◇ 이후락 평양 방문 계기로 서울-평양 직통전화 가설
고위급 상호방문을 추진하면서 서울과 평양을 잇는 상설 직통전화도 설치됐다.
서울-평양 직통전화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합의서는 7·4 남북공동성명과 같은 날 공식 발표가 됐지만 이 부장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이미 1972년 4월 말에 설치돼 운영이 시작된 과정이 남북회담문서에 담겨 있다.
서울에는 이후락 부장의 사무실에, 평양에는 김영주 부장의 사무실에 각각 전화기를 설치하고, 일요일·공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9시부터 12시까지, 16시부터 20시까지의 사이에 운용했다.
필요할 때는 미리 시간을 지정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통화했다.
이 직통전화는 휴전선 부근 우발 사건, 동서해 어선 피랍 등 남북 간에 예기치 않은 돌발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오판과 사태 악화를 막는 소통 채널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남북회담문서에 따르면 직통전화 통화 횟수는 4년 4개월 동안 본통화 238회, 시험통화 1천108회에 이른다.
1974년 광복절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에도 유지되던 남북직통전화는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1976년 8월 18일) 이후 북한에 의해 운용이 중단됐다.
그러나 직통전화 운용이 중단됐을 뿐 라인은 살아 있었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남쪽의 국가정보원과 북쪽의 통일전선부 사이를 연결하며 남북한 최고지도자의 뜻을 교환하는 '핫라인'으로 공식화했다.
이후 남북간 공식 연락채널이 불통 되더라도 이 채널을 활용해 소통할 수 있었고 현재도 남북한 최고지도자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 가동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남북 핫라인 72년 4월 첫 개설, 4년4개월간 본통화 238회 시험통화 1천108회 1971년 11월 2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 열린 남북 비밀접촉은 분단 후 남북 당국 간의 첫 공식 회담이다.
하루 전 열린 남북적십자회담 예비회담에서 우리 측이 제안해 성사됐다.
그보다 10년 전인 1961년 우리 군이 영관급 장교를 북한 용매도에 잠입시켜 비밀접촉을 타진한 일이 있었으나 공식적인 회담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6일 통일부가 공개한 남북회담문서를 보면 비밀접촉 1차회의에서 북측 실무자(김덕현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직속책임지도원)는 "요즘 세계를 협상의 시대라고 하든가요"라고 운을 띄우자 남측 실무자(정홍진 남북회담사무국 회담운영부장)가 "하기야 주먹으로 하려는 것보다 말로써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어요"라고 화답했다.
총 11차례 실무자 비밀접촉과 서울·평양 교환 방문을 거쳐 박정희 정권의 실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평양 방문이 확정됐다.
분단 27년 만에 시도하는 '적지' 방문인 만큼 고위급·실무자는 상호 방문 때 '상부'의 신임장을 휴대했으며 상대방으로부터는 신변안전보장각서를 받았다.
상대방에게 신변안전을 보장하고 회담 첫 전체회의에서 신임장을 교환하는 절차를 거치는 형식은 지금까지도 남북회담의 관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평양 방문 당시 이 부장은 대화 상대이자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명한 신변안전각서를 받았다.
당시 이 부장이 비장한 각오로 청산가리를 지니고 방북길에 올랐다는 일화는 본인의 후일담과 김종필 전 총리 등의 회고록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이 부장은 평양 주암 초대소에서 열린 김 부장과 1차 회담에서 "(남북 간) 인위적 장벽을 제거하는 시발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해 "친한 친구도 말렸지만" 방북길에 올랐다면서 "솔직히 말해서 내가 안 오리라 생각했지요?"라고 물었다.
김 부장은 "나는 오리라 생각했습니다"고 맞받으며 "'시작이 반'이라고 우리가 마주 앉으니 절반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고 답했다.
북한은 곧바로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제안하며 남측을 압박했다.
김 부장은 "이 부장과 내가 정치협상을 하고 있는 만치 이 급에서 내려가지 말고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만 단번에 해결된다"며 "우리의 정치협상은 우리당 총비동지(김일성)와 박 대통령 간에 정치협상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이 부장은 "처음부터 김 수상과 박 대통령이 회담을 하면 잘못될 경우 실망이 크게 된다.
통일이 궁극적으로 이뤄질 때 김 수상과 박 대통령의 회담이 있어야 한다"며 반대하고, "단계적인 방법을 제안"했다.
북측이 최고지도자간 협상으로 남북문제를 일시에 해결하는 톱다운(top-down·하향식) 방식을 제기하자 남측은 낮은 급에서 신뢰를 쌓아가며 문제를 단계적으로 풀어가는 보텀업(bottom-up·상향식) 방식으로 맞선 셈이다.
회담이 전개되는 내내 입장차를 좁히진 못했지만 남북은 '조국통일 3대 원칙'에 합의해 '7·4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해 통일정책의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남북은 ▲ 외세 간섭 없는 자주 통일 ▲ 무력 사용을 배제하는 평화통일 ▲ 사상·이념·제도를 초월한 민족의 단결 도모를 조국통일 3대 원칙으로 제시했다.
7·4 남북공동성명의 서명자는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이후락 김영주'로만 표시돼 있다.
당국 간 합의문서이긴 하나 서로를 정부로 공식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기관이나 직함 없이 고위급의 이름만 쓴 것이다.
남북회담문서에 손으로 결재 칸을 그려 대통령, 국무총리, 외무장관, 법무장관이 서명 또는 날인한 것도 눈에 띈다.
◇ 이후락 평양 방문 계기로 서울-평양 직통전화 가설
고위급 상호방문을 추진하면서 서울과 평양을 잇는 상설 직통전화도 설치됐다.
서울-평양 직통전화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합의서는 7·4 남북공동성명과 같은 날 공식 발표가 됐지만 이 부장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이미 1972년 4월 말에 설치돼 운영이 시작된 과정이 남북회담문서에 담겨 있다.
서울에는 이후락 부장의 사무실에, 평양에는 김영주 부장의 사무실에 각각 전화기를 설치하고, 일요일·공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9시부터 12시까지, 16시부터 20시까지의 사이에 운용했다.
필요할 때는 미리 시간을 지정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통화했다.
이 직통전화는 휴전선 부근 우발 사건, 동서해 어선 피랍 등 남북 간에 예기치 않은 돌발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오판과 사태 악화를 막는 소통 채널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남북회담문서에 따르면 직통전화 통화 횟수는 4년 4개월 동안 본통화 238회, 시험통화 1천108회에 이른다.
1974년 광복절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에도 유지되던 남북직통전화는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1976년 8월 18일) 이후 북한에 의해 운용이 중단됐다.
그러나 직통전화 운용이 중단됐을 뿐 라인은 살아 있었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남쪽의 국가정보원과 북쪽의 통일전선부 사이를 연결하며 남북한 최고지도자의 뜻을 교환하는 '핫라인'으로 공식화했다.
이후 남북간 공식 연락채널이 불통 되더라도 이 채널을 활용해 소통할 수 있었고 현재도 남북한 최고지도자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 가동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