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존 클라우저가 27일 서울 고려대에서 강연하고 있다. 이해성 기자
202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존 클라우저가 27일 서울 고려대에서 강연하고 있다. 이해성 기자
"아인슈타인이 생각한 물리적 공간과 시간 개념은 파괴됐다. 그것은 죽었다!(Einstein's basic platform for a space-time description of physics has been hereby destroyed. It's dead!)"

불세출의 천재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감히 누가 이렇게 평가했을까. '미래 산업 게임체인저' 양자기술을 현실화한 공로로 작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존 프랜시스 클라우저 박사가 27일 청중 앞에서 한 발언이다. 그는 이날 오후 6시 서울 고려대 대강당에서 열린 '제1회 넥스트 인텔리전스 포럼'에 참여해 양자기술 원리에 대해 강연했다. 강연에 앞서 그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진행 중인 양자기술 관련 글로벌 행사 '퀀텀코리아 2023'에 참석해 윤석열 대통령과 만났다.

고전역학은 특정 장소에 물체가 실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를 국소적 실재성(Local Realism)이라고 부른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이 국소적 실재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원자력 발전과 핵무기, 글로벌항법시스템(GPS) 등 인류 역사를 바꾼 많은 거대과학 기술이 상대성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양자역학은 다르다. 국소적 실재성을 부인하면서 모든 존재를 확률적으로 계산한다. 다시말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 연산단위로 구현하는 컴퓨터가 현재 IBM,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는 '양자컴퓨터'다.

양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최소 물리 단위다. 빛을 구성하는 광자, 원자핵 주변 궤도를 도는 전자 등이 양자다. 양자는 고전물리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흔히 ‘중첩과 얽힘’으로 표현된다. 일반 컴퓨터는 ‘0 또는 1’로 규정되는 비트가 기본 단위다. 양자컴퓨터는 ‘0이면서 동시에 1’일 가능성이 있는 큐비트(퀀텀비트)를 사용한다. 예를 들면 ‘30%의 0’과 ‘70%의 1’이라는 식이다. 이게 양자 중첩이다. 얽힘은 30%의 확률과 70%의 확률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뜻이다.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 이론(양자 중첩과 양자 얽힘)을 두고 물리학자들 사이 백년 가까이 논쟁이 이어졌다. 아인슈타인과 그의 학문적 동료인 보리스 포돌스키, 나단 로젠과 닐스 보어 간 논쟁이 대표적이다. 이를 E(아인슈타인)P(포돌스키)R(로젠)-보어 논쟁이라고 한다. 192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닐스 보어는 양자 얽힘의 가능성을 처음 열어젖힌 물리학자다. 이를 이어받아 양자 역학 상태를 수학적으로 처음 구체화한 학자가 파동방정식을 창안한 에르빈 슈뢰딩거다. 원자번호 1번인 수소에서 전자의 움직임을 기술했다.

클라우저 박사는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을 설명하면서 강연을 시작했다. 이어 "EPR-보어 논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클라우저 박사는 "국소적 실재성은 아인슈타인과 포돌스키, 로젠이 생각했던 국소적 숨은 변수(Local Hidden Variable) 이론을 일반화한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고전역학에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을 '물음표'로 남겨두면서 국소적 숨은 변수 이론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이를 수학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1964년 나온 벨 부등식이다.

클라우저 박사는 실제 물리적 실험으로 벨 부등식을 깬 공로로 지난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1969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실험을 했다. 클라우저 박사는 "실재하는 3차원 공간(lab space)이 아닌 다차원 배위 공간(configuration space)을 고안했다"고 설명했다. 이 실험에서 칼슘 원자의 양자 얽힘 상태가 실제로 존재함을 자체 설계한 빛을 통해 증명했다. 인류 역사상 최초다.
작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존 클라우저가 양자 얽힘을 증명한 실험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이해성 기자
작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존 클라우저가 양자 얽힘을 증명한 실험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이해성 기자
클라우저 박사는 '보른의 애매모호함(Born's Ambiguity)'도 언급했다. 막스 보른은 파동방정식을 확률밀도함수로 해석하고, 이를 적분하면 전자가 발견될 확률이 나온다는 것을 증명한 공로로 1954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보른의 애매모호함을 '방 안의 코끼리(elephant in the room)'에 비유했다.

방 안의 코끼리는 '모두가 불편해하면서도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상황'을 말하는 영미계 관용 표현이다. 보른의 확률밀도함수가 양자기술을 뒷받침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지배했던 과학계가 이를 불편해했다는 표현으로 해석된다. 클라우저 박사는 "잊혀졌던 방안의 코끼리(보른의 애매모호함)가 나의 실험으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50여 년 전 그가 시작한 이 실험은 현재 양자컴퓨터 논리회로 설계의 출발점이 됐다. 반도체 회로가 나노미터 이하로 초미세화되면서 마주한 '집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도 클라우저 박사가 증명한 양자 얽힘에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도청이 불가능한 양자정보통신이나 군용 레이더, 자율주행차 라이다의 기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양자 센싱 기술도 마찬가지다.

이날 고려대 대강당은 정보통신기술의 혁명을 이끈 세계적 석학을 보려는 학생과 교수 등으로 가득 찼다. 클라우저 교수는 다음과 같이 학계에 의문을 던지며 강연을 마쳤다.

"블랙홀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른 중력장의 왜곡에서 비롯된다. 블랙홀의 스핀(전자가 갖는 고유한 운동 상태)을 양적으로 기술할 수 있을까?"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