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의 베르디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공연 사진.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의 베르디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공연 사진.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은 올해 두 번째 작품으로 지난 4월 ‘맥베스’에 이어 다시 한번 베르디를 선택했다. 바로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와 더불어 베르디의 ‘3대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일 트로바토레(음유시인)’다.

전설적인 테너 엔리코 카루소에 따르면, ‘일 트로바토레’의 성공적인 공연을 위해서는 세계 최고의 가수 4명이 필요하다. 그만큼 이 작품에서 주역 4인의 비중은 절대적이며, 그 하나하나가 최고 수준의 기량을 요구하는 고난도 배역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 국립오페라단은 조역은 물론이고 주역 4인방의 캐스팅까지 거의 국내 가수들로 채웠다. B팀에서 레오노라 역할을 맡은 러시아 소프라노 예카테리나 산니코바가 유일한 예외였다. 덕분에 우리나라의 성악 자원이 얼마나 풍부하고 탄탄한지 새삼 확인하는 기회가 됐다.

필자는 B팀이 출연한 금요일(23일) 공연을 보았는데, B팀으로서는 첫 공연이었던 탓인지 공연 초반에는 가수들의 노래에서 어느 정도 긴장감이 감지되기도 했다. 일단 주역 4인 가운데 가장 돋보였던 가수는 집시여인 아주체나로 분한 양송미였다.

비록 첫 곡 ‘불꽃이 타오른다’에서는 목이 조금 덜 풀린 듯 고음에서 다소 힘겨워하는 기색도 내비쳤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예의 풍부한 음색이 살아나며 빼어난 노래와 몰입도 강한 연기를 펼쳐 보였다. 특히 3막 심문 장면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와 4막 감옥 장면에서 몽환과 절규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모습은 소름 끼칠 정도였다.
국립오페라단의 베르디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공연 사진.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의 베르디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공연 사진. 국립오페라단 제공
만리코 역의 이범주와 루나 백작 역의 강주원도 준수했다. 이범주는 강인함 속에 깊은 서정미가 밴 음색이 돋보이는 테너로, 무대 뒤에서부터 노래하며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연인을 향한 사랑의 맹세와 결전을 앞둔 장수의 심경이 교차하는 3막 아리아의 서정미와 비장미도 잘 살렸다.

강주원은 풍부한 성량이 돋보이는 바리톤으로, 1부에서는 몸이 덜 풀린 듯 다소 들뜬 소리를 내 아쉬웠지만, 2부에서는 제 컨디션을 찾아 무대를 넉넉히 장악했다. 아울러 조역인 페란도 역의 최웅조도 견실한 가창으로 극 특유의 암울한 분위기를 잡아나가는 데 톡톡히 일조했다.

반면에 레오노라 역의 산니코바는 적잖은 아쉬움을 남겼다. 리리코와 드라마티코를 겸비한 듯한 그녀의 음색은 배역에 적합해 보였지만, 당일 컨디션이 안 좋았던지 꾸준히 음정 불안을 노출하며 보는 이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특히 이 작품의 백미로 꼽히는 4막 아리아 ‘사랑의 장밋빛 날개를 타고’와 이어지는 ‘미제레레’에서는 불편한 자세로 노래한 탓인지 음성에 충분한 무게를 싣지 못하는 문제까지 겹쳐 노래의 감흥을 약화시켰다. 다만 만리코와의 마지막 2중창에서 뒤늦게나마 범상치 않은 연기력과 가창력을 드러내 보여 최종적 평가는 유보하게 했다.
국립오페라단의 베르디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공연 사진.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의 베르디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공연 사진. 국립오페라단 제공
이탈리아의 젊은 지휘자 레오나르도 시니(1990년생)의 지휘에는 부침이 있었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에서 단정하고 균형 잡힌 관현악을 이끌어내며 주역들의 아리아를 무난하게 뒷받침한 부분은 긍정적이었으나, 앙상블과 합창의 짜임새가 떨어진 부분은 부정적이었다. 그로 인해 1막 피날레의 3중창은 박진감이 떨어졌고, 2막의 유명한 ‘대장간의 합창’은 강렬하고 장쾌한 맛이 부족했으며, 3막의 ‘병사들의 합창’에서는 합창과 관현악의 박자가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했다.

이번 공연의 주요 관전 포인트 가운데 하나는 이탈리아의 저명 연출가 잔카를로 델 모나코의 무대 연출에 있었다. 델 모나코는 작품의 배경을 원작의 중세가 아니라 미래(혹은 현재)의 ‘디스토피아’로 재설정했는데, 상황에 따라 이동하고 회전하는 4개의 거대한 타워를 중심으로 뉴욕의 뒷골목이 구현되고 잠시 ‘맨해튼 브리지’가 보이기도 했던 무대 세트는 (연출가가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이기도 했다.

특색 있는 무대 의상과 엑스트라들의 활극까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 무대였지만, 그 모든 것이 작품의 감성에 얼마나 부합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주체나와 루나 백작의 절규가 교차한 직후, 연출가의 지시로 루나 백작이 막이 내려올 때까지 수행하는 극단적 제스처는 납득하기 어려웠고 지나치게 불편했다.

황장원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