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점도 안한 답안지 실수로 파쇄…시험 한달 가까이 지나 사고 사실 파악
수험생 "말문 막힌다" 분통…어수봉 산업인력공단 이사장 "머리 숙여 사과"
사상 초유 국가자격시험 사고…답안지 파쇄에 609명 재시험 봐야(종합2보)
채점도 하지 않은 600여 명의 국가자격시험 답안지가 공공기관의 실수로 파쇄되는 초유의 사고가 발생했다.

결국 600여 명의 수험자가 시험을 다시 봐야 해 강한 반발이 예상되는 데다 시험의 공정성·형평성 등의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대규모 소송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23일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지난달 23일 서울 은평구에 있는 연서중학교에서 시행된 '2023년 정기 기사·산업기사 제1회 실기시험'의 필답형 답안지가 채점 전에 파쇄됐다.

서울 지역 시험장 가운데 한 곳인 연서중에서는 건설기계설비기사 등 61개 종목의 수험자 609명이 시험을 봤다.

시험 종료 후 답안지는 포대에 담겨 공단 서울서부지사로 운반됐다.

이후 인수인계 과정에서 착오가 발생해 이 포대는 공단 채점센터로 옮겨지지 않고 파쇄된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따라 전국에서 이 시험을 본 15만1천797명 가운데 609명이 공단의 잘못으로 시험을 다시 한번 치러야 하는 황당한 상황에 놓였다.

사고 경위를 살펴보면 공단의 대처가 얼마나 어설펐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난달 23일 시험을 치른 직후 공단 서울서부지사에는 16개 시험장의 답안지를 담은 18개 포대가 옮겨졌다.

답안지는 모두 금고에 보관해야 하는데, 18개 포대 중 17개만 입고됐다.

연서중 시험지는 직원의 실수로 금고 옆에 있는 창고로 옮겨졌다.

이튿날인 지난달 24일 금고 안의 답안지는 다른 지역에 있는 채점실로 보내졌다.

채점실 관계자는 답안지 중 누락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고 발생 사실이 확인된 시점도 시험을 치른 지 한 달 가까이나 흐른 지난 20일이다.

공단 측은 "국가자격시험이 매우 많기 때문에 시험을 치른 즉시 채점을 하지는 못한다"고 설명했다.

결국 본격적인 채점을 시작한 이후에야 사고 사실이 드러났는데, 이때는 609명의 수험자 답안지가 이미 파쇄된 뒤였다.

609명의 응시자는 이 같은 사실을 모른 채 시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공단은 609명 전원에게 개별 연락해 사과하고 후속 대책을 설명할 예정이다.

공단은 수험자의 공무원시험 응시 등 자격 활용에 불이익이 없도록 다음 달 1∼4일 추가시험 기회를 제공하기로 했다.

공단은 당초 예정된 기사·산업기사 정기 1회 실기시험 합격자 발표일(6월 9일)에 시험 결과를 발표할 수 있도록 조치할 계획이다.

내달 1∼4일 시험을 볼 수 없는 수험자는 내달 24∼25일에 치를 수 있다.

이들에 대한 합격자 발표는 내달 27일 이뤄진다.

공단은 각기 다른 6번의 시험 문제를 다시 출제해야 한다.

각각의 시험 난이도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지와 이미 시험을 정상적으로 치른 15만여 다른 수험자들과 형평성을 어떻게 맞출지 등 복잡한 문제가 남아 있다.

내달 중순으로 예정된 다른 시험에 이번에 문제가 된 시험의 자격증을 제출할 계획이었지만 개인 사정상 내달 1∼4일에 재시험을 볼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할 수도 있다.

대규모 손해배상 소송이 예상된다는 지적에 공단 관계자는 "손해가 최대한 복구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며 "되도록 내달 1∼4일 시험에 많이 응시해 당초 예정된 합격자 발표일(6월 9일)에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다"고 답했다.

공단은 609명에게 교통비 등을 지원하고, 추가 보상 방안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

이들 중 재시험을 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수수료를 전액 환불한다.

공단은 책임자를 문책하는 등 엄중히 조치하고, 유사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국가기술자격 시행 프로세스 전반에 대해 재점검하기로 했다.

공단 어수봉 이사장은 이날 오전 급히 마련된 사과 브리핑에서 "국가자격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담보해야 할 공공기관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점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어 이사장은 "공단이 관리를 소홀하게 운영해 시험 응시자 여러분께 피해를 준 점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며 "신뢰 회복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하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임하겠다"고 말했다.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단순한 사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날선 반응이 나왔다.

한 응시자는 "가채점 결과 합격할 것으로 예상돼 시험일 이후 바쁘게 일상을 보내고 있었는데 다시 시험을 봐야 한다니 말문이 막힌다"며 "다음 달 초까지 열흘 남짓 다시 공부해서 합격할 자신이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다른 응시자는 "사과와 보상으로 끝날 수 없는 문제"라며 "정부 산하 공공기관에서 이런 일이 연이어 발생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앞서 작년 7월에는 공단 주관의 세무사 자격시험이 부실하게 채점됐다는 감사원 공익감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에 공단은 채점을 다시 하겠다면서 "수험자와 관계자에게 심려를 끼쳐드린 점을 사과드린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1년도 안 돼 더 큰 사고를 일으켜 신뢰 저하를 자초했다.

사상 초유 국가자격시험 사고…답안지 파쇄에 609명 재시험 봐야(종합2보)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