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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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에서는 지폐에 자국 위인의 초상을 포함하는 이유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이번에는 유럽환율조정체제에 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필자가 박사학위를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공부하기로 한 배경엔 유럽을 여행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영국에서 유학하며 유럽을 여행할 때 겪는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화폐였습니다. 유럽대륙의 국가들은 유로화를 사용하는 데, 영국은 파운드화를 사용했기에 유럽 대륙으로 여행할 때 마다 매번 화폐를 바꿔야 해 불편했습니다.

유럽은 오랫동안 단일통화 구축에 힘썼습니다. 1970년 '베르너 보고서'를 시작으로 1979년 3월 유럽통화제도(European Monetary System, EMS)를 출범했습니다. 1979년 체결된 유럽통화제도의 일환으로 유럽환율조정체제가 도입됩니다. 이 유럽환율조정체제는 유럽 국가 화폐 간의 환율변동을 조정해서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이 체제는 유럽연합의 통화동맹이나 단일 통화 도입의 신호탄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어 1986년 단일유럽의정서(Single European Act)를 체결하고,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서명하며 유로가 본격적으로 도입됐습니다. 2023년 5월 현재, 유로존 소속 20개국과 통화협정이 체결된 미소 국가 4개국(모나코·바티칸·산마리노·안도라)을 포함 총 26개국, 약 3억5000만여명의 사람이 유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영국은 파운드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당초 영국은 유럽의 단일통화 구축과정에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서독의 낮은 인플레이션과 눈부신 경제성장을 목도한 영국은 서독의 통화정책과 보조를 맞췄고, 1990년 존 메이저의 지휘아래 유럽환율조정체제에 가입합니다. 당시 영국 내 기업들과 언론은 이러한 결정을 지지했고 영국의 유럽경제에 대한 편입은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유럽환율조정체제에 가입한 지 얼마 지니지 않아 조지 소로스와 함께 1992년 9월 16일, 검은 수요일(Black Wednesday)이 찾아옵니다. 당시 1파운드는 2.95 서독 마르크로 교환비율이 고정됐습니다. 목표비율과 6% 이상 교환비율이 차이가 나게 되면 당국이 개입을 해야 한다는 규정때문에 만약 파운드화가 2.773마르크 이하의 가치로 거래된다면 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과 영국 정부는 외환시장에 개입해야만 했습니다.

조지 소로스의 퀀텀 펀드는 이점을 노렸습니다. 그는 파운드의 가치가 독일의 마르크에 비해 과대 평가 되어 있다는 것에 베팅해 큰 수익을 냈습니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유럽통화제도를 떠났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유럽환율조정체제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칼럼에서는 조지 소로스가 어떻게 파운드화를 공격하여 영국이 유럽통화제도를 떠나야 했는지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홍기훈 홍익대학교 경영대 교수, 메타버스금융랩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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