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에 3천명의 아이들 유기돼…자식 죽이는 범죄"
"보육원내에 성폭행 적지않아…사망시 장례식 없어"
"합법적 인신매매 진행"…고아권익연대 조윤환 대표

[편집자주: 고아권익연대 조윤환 대표 인터뷰는 21일과 25일 두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21일에는 개인적인 스토리를 주로 담았고, 25일에는 보육원의 구조적 문제와 고아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 대한 내용 등을 담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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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나는 6살에 강남고속터미널, 누나는 7살에 서울역에 버려졌다"
고아권익연대 대표 조윤환(44)은 33년간 고아로 살았다.

6살 때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버려졌다가 39세였던 2018년에 부모님을 찾았다.

한 살 위인 그의 누나도 비슷한 시기에 서울역에 버려졌다.

누나는 목포의 보육원에서, 동생은 부여의 보육원에서 각각 자랐다.

그를 지난 18일 서울 구로구 고아권익연대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일부 사람들은 "오죽하면 아이를 버렸겠느냐"면서 유기 부모를 두둔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인식이라고 했다.

키울 여력이 충분한데도 자신의 낭만적인 삶, 제2의 인생을 위해 자녀를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부모가 어떤 이유에서든 자녀를 버리는 것은 범죄 행위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경찰은 버려진 아이의 부모를 찾으려 하지 않고, 보육원도 아이들을 상품으로 보는 측면이 있어 부모 찾기에 나서지 않는다고 했다.

합법적 인신매매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희생되는 아이가 한해에 3천명에 이른다고 그는 말했다.

조윤환은 서울의 강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대전 침례신학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뒤 전도사, 택시 기사 등을 거쳐 지금은 용달차 한 대를 구입해 화물 운송업을 하고 있다.

그는 지난 2018년 고아권익연대를 만들어 어려움에 빠진 고아들을 경제적, 정서적, 행정적으로 지원하고 부모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다.

대학원 다닐 때 만난 아내와 결혼해 2남 2녀를 두고 있다.

[삶] "나는 6살에 강남고속터미널, 누나는 7살에 서울역에 버려졌다"
-- 고향은 어디인가.

▲ 태어난 곳은 서울 용산구 후암동이다.

후암동에서 출생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자란 곳은 부여의 한 보육원이다.

-- 부여의 보육원에는 어떻게 가게 됐나.

▲ 엄마가 나를 서울의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버렸다.

나는 경찰서와 대방동 임시아동보호소를 거쳐 부여의 보육원에 가게 됐다.

--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버려졌을 당시를 기억하나.

▲ 6살 때였다.

엄마와 함께 천안 외할머니댁에 며칠 머무른 뒤 서울 집에 가기 위해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엄마는 당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아버지를 모셔 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엄마는 오지 않았다.

처음에 나는 엄마가 나의 나쁜 버릇을 고치기 위해 벌을 주는 줄 알았다.

다시는 나쁜 짓을 안 할 테니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다.

엄마 동전에도 손을 안 대고, 엄마가 주는 옷을 그대로 입고, 편식하지 않겠으니 한 번만 엄마를 보내달라고 빌었다.

울고 또 울었지만, 엄마는 오지 않았다.

밤이 돼서 경찰이 나를 데려갔다.

-- 찾아온 경찰관한테 뭐라고 했나.

▲ 울면서 엄마를 찾아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경찰은 나의 손을 잡고 터미널을 한 바퀴 돌고는 엄마가 없으니 이제는 가자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어머니는 터미널 내 한구석에 숨어서 나를 계속 지켜봤다고 한다.

어머니는 경찰관이 나를 데리고 가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터미널을 떠났다고 한다.

그때 경찰관이 오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나를 데려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삶] "나는 6살에 강남고속터미널, 누나는 7살에 서울역에 버려졌다"
-- 버려질 것을 사전에 전혀 몰랐나.

▲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신호가 있었다.

내가 평소에 야구복을 사달라고 떼를 많이 썼지만, 어머니는 절대로 사주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가 천안 외가에 내려갈 때는 갑자기 야구복을 사줬고, 나는 그 옷을 입고 즐거운 기분으로 외가댁에 갔다.

어머니는 그때 이미 나를 버릴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 어머니는 왜 아들과 함께 외가댁을 방문했나.

▲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버리는 문제에 대해 외할머니와 최종적으로 상의한 것 같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외가댁에서 신나게 놀았다.

-- 본인이 버려진다는 것을 외할머니만 알고 있었나.

▲ 아니다.

외할머니뿐 아니라 외삼촌, 이모 등 온 가족이 사전 또는 사후에 알고 있었다고 본다.

[삶] "나는 6살에 강남고속터미널, 누나는 7살에 서울역에 버려졌다"
-- 누나가 있다고 하던데.
▲ 한살 위의 누나가 있다.

누나는 내가 버려지기 직전 서울역에 유기됐다.

지금도 그때가 기억난다.

어머니는 누나가 없어졌다면서 갑자기 서울역에 가보자고 했다.

엄마는 나의 손을 잡고 서울역 주변을 한 바퀴 돌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경찰관이 내 손을 잡고 고속버스터미널을 한 바퀴 도는 것과 같다.

나름대로 찾아봤다는 인상을 나에게 주기 위한 형식적인 행위였다.

-- 누나도 보육원으로 갔나.

▲ 누나는 서울역에서 껌팔이 등을 시키는 사람들에 의해 열차에 태워졌다.

누나는 목포에서 승무원에 의해 발견됐고 그곳에 있는 보육원에 들어갔다.

나는 부여, 누나는 목포에서 각각 살게 된 것이다.

-- 어머니는 자식들을 왜 버렸나.

▲ 어머니가 재혼하려 했는데, 새 남편이 자식을 데려오지 못하게 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누나를 못 데려가도, 아들인 나는 데려가는 쪽으로 협상을 시도했던 것 같다.

당시 새 남편도 아들 한명을 데리고 왔으니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분은 엄마에게 자식 없이 홀로 오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누나뿐 아니라 나까지 버리기로 결정한 것 같다.

-- 외가댁이 가난했나.

▲ 아니다.

천안에서 5만∼6만평의 땅을 갖고 포도 농사를 짓는 유지였다.

할머니는 비슷한 수준의 집안에 어머니를 다시 시집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 외할머니는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나.

▲ 아버지는 카센터 사장이었지만 어머니를 폭행했고, 도박을 하느라 집에 안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외할머니는 나의 아버지를 안 좋아했다.

내가 버려졌을 당시 아버지는 일을 하시다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 중이었다.

[삶] "나는 6살에 강남고속터미널, 누나는 7살에 서울역에 버려졌다"
-- 본인이 버려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언제인가.

▲ 경찰관이 내 손을 잡았을 때 나는 버려졌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경찰서를 거쳐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아동 임시보호소로 넘겨졌다.

가자마자 나는 몽둥이로 맞는 사람들을 봤다.

어린 나이이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곳에 몇개월 있었는데, 매일 시체가 실려 나갔다.

-- 본인과 누나가 따로따로 버려진 이유는 무엇인가.

▲ 그것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어머니가 그 이유에 대해 아직 말씀을 안 하시고 있다.

남매를 함께 버렸으면 그나마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보육원에 있을 때 형제와 자매, 남매가 서로 의지하면서 지내는 것을 봤다.

-- 경찰서와 대방동 보호소, 보육원은 부모를 찾는 노력을 하지 않았나.

▲ 나는 경찰에 나의 이름과 누나의 이름 정도는 정확히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찰서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다.

대방동 보호소에서도 나는 누나 이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으나 기록돼 있지 않았다.

나이와 이름, 보낸 보육원 이름만 있었다.

대방동 보호소의 기록에는 내 이름이 전윤환으로 돼 있는데, 아버지를 다시 만난 뒤 성이 우여곡절을 거쳐 조씨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서 지금은 내 이름을 조윤환으로 하고 있다.

-- 누나도 부모를 찾아달라고 보육원에 부탁했을 텐데.
▲ 누나는 한국 나이로 8살이었으니 본인과 동생, 어머니의 이름을 또박또박 댈 수 있었다.

누나는 부모를 찾아달라고 보육원에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도 무시당했다.

누나는 다니던 용산구 평강교회도 기억하고 있었다.

-- 보육원은 왜 누나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나.

▲ 고아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고아 한명을 데리고 있으면 국가에서 지원금이 나온다.

누나가 보육원에서 나가면 그만큼 수입이 줄어든다.

이런 것이 인신매매다.

[삶] "나는 6살에 강남고속터미널, 누나는 7살에 서울역에 버려졌다"
-- 부모님은 어떻게 상봉하게 됐나.

▲ 2018년에 본격적으로 부모님 찾기에 나섰다.

1979년생 전후로 군 신체검사를 받지 않은 병역 기피자 등을 경찰과 행정부가 추적해서 부모님으로 추정되는 분을 어렵게 찾았다.

경찰은 상봉 2개월 전에 아버지와 나를 각각 불러서 DNA 검사를 했다.

그 결과, 부자 관계임이 확인됐다.

나는 그 후 2개월간 너무 힘들었다.

아버지가 만남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다행히 아버지와 새어머니, 누나, 매형, 조카를 구로경찰서에서 만나게 됐다.

어머니는 나를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 첫 만남에서 아버지는 뭐라고 했나.

▲ 첫마디가 "미안하다"였다.

아버지도, 누나도, 나도 울었다.

나는 괜찮고, 이해한다고 했다.

이제는 헤어지지 말고, 좋은 추억을 만들자고 했다.

평생의 꿈이 이뤄졌으니 너무 기뻤다.

마치 다른 세상에 태어난 느낌이었다.

[삶] "나는 6살에 강남고속터미널, 누나는 7살에 서울역에 버려졌다"
-- 누나는 이미 가족을 만나고 있었나.

▲ 누나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보육원 사무국장으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듣고는 가출했다.

그때 누나는 천안에 외갓집이 있었고 근처에 큰 공장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외갓집을 간신히 찾았다.

누나는 부모님으로부터 학비 지원을 받아 다시 고등학교로 돌아간 뒤에 대학에도 진학할 생각이었으나 지원받지 못했다고 한다.

-- 아버지는 자식이 버려졌다는 것을 전혀 몰랐었나.

▲ 그 당시 엄마한테 전화로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고 했다.

큰아이는 잃어버렸고 둘째는 죽었다고 엄마는 답변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 말이 믿기지 않아 고속버스터미널 주변 경찰서 등을 찾아다니며 나에 관해 물어봤지만 아는 사람도 없었고, 기록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했다.

-- 어머니는 나중에 만났나.

▲ 어머니의 주소를 파악해 찾아갔다.

나는 어머니에게 우리 남매를 왜 버렸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고 어머니도 그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똑바로 내 눈을 보지 못했고,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계셨다.

[삶] "나는 6살에 강남고속터미널, 누나는 7살에 서울역에 버려졌다"
-- 아이를 버리는 경우, 부모가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 아닐까.

▲ 잘못 알고 있다.

부모를 버린 사람들을 추적하면 생활이 그렇게 빈곤하지 않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아이를 낳는 경우가 있는데, 조부모가 키워줄 수도 있으니 버려서는 안 된다.

내가 택시 기사를 할 때 손님으로 탑승했던 60대 할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딸이 중학교 때 아이를 낳았는데, 보육원에 버릴까 고민하다 본인이 직접 키웠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잘한 선택이고 그 아이가 이제는 복동이라고 한다.

부모가 아이를 버리는 것은 자기를 위해 자식을 죽이는 이기적 행위다.

-- 자녀를 버리는 것은 범죄에 해당하나.

▲ 자기의 낭만을 위해, 자기의 제2 인생을 살기 위해 자녀를 살해하는 것이다.

그러니 범죄다.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

아이가 고아가 된다는 것은 거의 죽음과 다름없다는 인식을 해야 한다.

이렇게 버려지는 아이가 한해에 3천명이나 된다.

-- 보육원은 왜 아이들 부모를 찾는데 적극적이지 않을까.

▲ 보육원 입장에서 고아들은 상품이다.

고아들이 있어야 국가에서 지원금이 나오고 각종 후원금도 들어온다.

나의 어린 시절 보육원 원장도 대방동 아동보호시설에 와서는 쇼핑하듯이 아이들 12명을 골라 봉고차에 태웠다.

그러니 원장이 나의 부모를 찾는 데 관심을 가졌을 리 없다.

-- 경찰은 왜 적극적으로 찾아주지 않았을까.

▲ 경찰은 버려진 아이의 부모를 다시 찾아주기보다는 보육원에 맡기는 것이 아이를 위해 더 나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적극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아무리 나쁜 부모라고 하더라도 부모보다 더 좋은 보육원은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삶] "나는 6살에 강남고속터미널, 누나는 7살에 서울역에 버려졌다"
-- 보육원에 아이가 처음 도착하면 많이 우는가.

▲ 금방 울음을 그친다.

울면 두들겨 맞기 때문이다.

아이는 오자마자 울음 그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보육원이 죽을 수도 있는 곳임을 아이들은 그때 깨닫는다.

-- 보육원에서 아이들이 죽는 경우도 많나.

▲ 내가 보육원에 있었을 때 7살 먹은 어린아이가 독감으로 죽는 것을 봤다.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데, 방치돼 죽은 것이다.

자살하는 아이들도 많다.

그러나 이런 죽음은 대체로 은폐된다.

보육원에서는 장례식도 없고, 시체는 조용히 처리된다.

이런 죽음이 알려지면 보육원 수입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지자체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경우가 많다.

-- 보육원 생활은 어떠했나.

▲ 부여 보육원에 80여명의 고아가 있었는데, 구타와 기합이 많았다.

눈 오는 날 밖에서 팬티만 있고 구르는 기합을 받기도 했다.

어떤 형들은 말을 안 듣는다며 인분을 먹이기도 했다.

한방에서 자는 아이는 10∼20명이나 됐다.

방이 비좁아 서랍장 위에서 자다가 떨어진 아이도 있었다.

식사는 대체로 보리밥이었고, 밥에서 애벌레가 자주 나왔다.

반찬은 김치 외에 특별한 것이 없었다.

우리는 항상 배가 고팠다.

숙소 위생도 불량해 내 귓속으로 벌레가 들어가 고생한 적이 있다.

보육원은 교도소나 군대 같은 곳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보육원이 고아들의 천국이라고 말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 지금 보육원 상태는 어떤가.

▲ 이전처럼 열악하지는 않다.

지금은 한 방의 인원이 보통 3∼7명이고 2명인 경우도 있다.

자기 책상도 있다.

브랜드가 있는 옷을 입기도 하는데, 민망한 일이 생기곤 한다.

대량으로 후원받은 것이니 보육원생들이 같은 브랜드의 가방을 들고, 동일한 상표의 옷과 신발을 착용하고 학교에 가기 때문이다.

당연히 친구들 눈에 띄는 문제가 있다.

-- 본인이 보육원에 있을 때 원장은 어디서 살았나.

▲ 보육원에서 2∼3㎞ 떨어진 곳에 원장 사택이 있었다.

원장이 산을 3∼4개 매입해 한 편에는 보육원, 다른 한편에는 사택을 지어 보유하고 있었다.

원장의 집은 별장 같았고, 풀장도 있었다.

[삶] "나는 6살에 강남고속터미널, 누나는 7살에 서울역에 버려졌다"
-- 보육원 원장과 보육교사들은 내부 가혹행위를 알고 있었나.

▲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아이를 통솔하기 위해서는 가혹행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들은 가혹행위를 장려했다.

지금은 가혹행위를 못 한다.

그러다 보니 보육원 원장과 보육교사들은 아이에게 감정 기복이 심하다면서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약물 같은 것을 남용해서 먹이는 일이 있다.

-- 병원이 그런 처방을 내주나.

▲ 인근 정신과 병원에게 보육원은 주요 고객이다.

좋은 수입원이니 원장이 원하는 대로 처방을 잘해주는 편이다.

보육원과 정신과의 유착이 생기는 것이다.

아이가 약물 복용 후에도 말을 듣지 않으면 정신병원이나 소년원에 보내기도 한다.

-- 보육원에서 성폭력이 발생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 적지 않다.

내가 보육원에 있을 때는 고등학교 3학년 남학생이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를 성폭행한 일이 있었다.

특정 아이가 한번 성폭행당하면 다른 아이들도 그 아이를 성폭행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 아이도 그런 일을 겪었다.

그 아이는 퇴소 후 집창촌을 거쳐 술집에서 일하다 몇 년 전에 변사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자살이라고 했다.

고아권익연대 대표인 나는 자살로 판단하는 이유를 물었지만, 직계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고아는 억울하게 죽어도 그 원한을 풀 수 없다.

-- 보육원에서 성폭행이 일어나면 보육교사나 원장이 어떻게 대응하나.

▲ 가능하면 조용히 덮으려 한다.

보육원 입장에서 후원을 많이 받으려면 이미지 관리가 중요하다.

게다가 보육원에서는 성폭행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문화가 있었다.

워낙 가혹행위가 많고 마음의 상처가 크기 때문인 것 같다.

[삶] "나는 6살에 강남고속터미널, 누나는 7살에 서울역에 버려졌다"
-- 보육원에서 아이들도 노동을 하나.

▲ 소풍날에 보육원에서 김밥을 싸준 적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중학교 때 소풍날에는 보육원에서 일을 해야 했다.

그때가 한참 농번기여서 원장 소유 논밭에서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당시 원장이 보유하고 있던 땅이 50마지기는 됐다.

-- 운동회날 보육교사가 학교에 오나.

▲ 운동회날은 일반 도시락을 싸서 갔다.

보육원 원장이나 보육교사가 운동회에 오지 않았지만, 친구들한테 많이 얻어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날은 풍족한 날이어서 친구들이 김밥을 많이 남기기 때문이다.

친구들한테 과자나 음료수도 얻어먹을 수 있는 날이었다.

[삶] "나는 6살에 강남고속터미널, 누나는 7살에 서울역에 버려졌다"
-- 본인의 학교 진로는 어떠했나.

▲ 나는 중학교 시절에 공부를 잘한 편이었다.

반에서 1등을 했고, 전교에서는 5등을 했다.

부여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는데, 상위 10% 학생들이 들어가는 특수반에 배치됐다.

나는 강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거쳐 대전 침례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 공부를 했다.

-- 학비는 어떻게 마련했나.

▲ 고등학교 3학년 때 보육원 원장에게 대학에 가겠다고 했더니 대뜸 "너, 돈 있냐"고 물었다.

나는 보육원이 등록금을 줄 것으로 생각했었기에 너무 서러워 펑펑 울었다.

대학에 가서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장학금도 받았다.

대학원 다닐 때는 오전에 전단 돌리기 등의 일을 하고, 야간에 수업을 듣는 방식으로 학업을 마쳤다.

--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학원에도 보내주나.

▲ 보육원은 아이들의 10% 정도를 특별 관리한다.

마케팅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아이들을 길러냈다고 홍보할 수 있어야 지원이 들어온다.

그래서 보육원생의 10% 정도는 원하면 학원에 갈 수 있다.

근처 학원들도 보육원생들에게 무료로 수강할 수 있는 특혜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보육원 아이들 대부분은 학원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 대학원 졸업 후에는 무엇을 했나.

▲ 전도사를 하다 법인 택시, 개인택시 운전사를 거쳐 지금은 용달차로 화물을 운송하는 일을 하고 있다.

수입은 그런대로 괜찮다.

결혼하고 2남 2녀의 자식을 두고 있는데, 돈이 많지는 않지만 가정을 이뤘다는데 나는 행복하다.

-- 아이를 버리려는 부모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 부모가 살아 있는데, 집에서 안 키우는 것은 유기에 해당한다.

보육원 등에서 아이가 행복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버려야 한다.

본인이 키우는 것보다 나은 곳은 없다.

가난하고 힘들더라도 데리고 살아야 한다.

(취재지원 이건희 인턴기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