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저녁’(1914)
‘푸른 저녁’(1914)
“사람들이 내 작품에서 ‘외로움’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같다(The loneliness thing is overdone).”

‘고독의 화가’로 불리는 20세기 미국의 대표 화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는 생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불평한 적이 있다. 세상을 관찰하고 느낀 인상을 그림에 그대로 표현했을 뿐 결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작품을 그린 건 아니라는 항변이었다. 실제 그의 삶은 외롭지 않았다. 40대부터 거장으로 평가받기 시작했고, 아내인 조세핀 니비슨과 한평생 해로했다. 하지만 호퍼 생전부터 지금까지 그의 작품은 고립과 단절, 소외의 상징으로 곧잘 읽힌다.

‘외로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장

20일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한 호퍼의 국내 첫 회고전 ‘길 위에서’는 이 같은 ‘호퍼=고독’이라는 고정관념에 균열을 내는 전시다. 도시인의 고독을 드러낸 작품뿐 아니라 다채로운 색상의 풍경화, 아내와의 일상을 그린 서정적인 수채화, 작가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 있는 기록물이 대거 나와 있기 때문이다. 전시작은 총 160여 점. 호퍼의 작품과 기록물을 가장 많이 보유한 미국 뉴욕 휘트니미술관과 협업했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객들은 작가의 자화상과 초기작을 지나 호퍼가 32세 때 프랑스 파리에서 그린 작품 ‘푸른 저녁’(1914)을 만나게 된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등장인물과 가라앉은 색채에서 특유의 고독한 정서가 배어 있다. 이후 나오는 ‘황혼의 집’(1935)과 ‘뉴욕 실내’(1921),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빌려온 ‘밤의 창문’(1928) 등도 잘 알려진 호퍼 작품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뉴욕의 일상 풍경을 표현한 에칭 판화와 수채화도 마찬가지다.
‘이층에 내리는 햇빛’(1960)
‘이층에 내리는 햇빛’(1960)
전시 분위기는 중반에 나오는 풍경화 ‘철길의 석양’(1929) 이후 반전된다. 1910년대 뉴잉글랜드 여행에서 그린 풍경화에서는 밝고 생생한 색채와 역동적인 구성이 돋보인다. 이후 전시는 호퍼의 휴가지였던 케이프코드를 모티브로 한 ‘2층에 내리는 햇빛’(1960)과 ‘오전 7시’(1948), 조세핀을 소재로 한 수채화와 유화 작품들로 이어진다.

철저하고 치밀한 화가

‘자화상’(1925~30)
‘자화상’(1925~30)
호퍼는 신중하고 계획적인 화가였다. 작품을 그리기 전에 치밀하게 구성을 짰다. 그가 생전 남긴 유화 작품이 360여 점에 불과한 이유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오랫동안 생각해야 한다. 모든 게 머릿속에 그려질 때까지 그림을 시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수채화조차도 유화처럼 그렸다. 호퍼의 수채화 작품에서는 물감이 끝나는 경계를 표시한 연필 자국을 관찰할 수 있다. 수채물감 특유의 번지는 효과까지 철저히 통제한 것이다. 그를 유명하게 한 결정적 작품들도 유화가 아니라 수채화였다. 이런 사실은 호퍼의 대표작인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의 습작에서 잘 드러난다. 작품 옆에는 관련 기록이 나란히 전시돼 있다. “밤과 저렴한 식당의 밝은 내부 전경, 밝은 사물은 체리나무, 카운터와 둘러싼 의자 윗부분, 오른쪽 안쪽에 있는 금속 물탱크에 비친 빛. 유리창 바닥을 따라 캔버스 4분의 3을 가르는 일렬로 놓인 청록색 타일…(후략).” 일반적인 전시에서 핵심 작품을 배치하는 1층 공간에 기록물 110여 점을 전시한 것도 호퍼의 이런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미술계 일각에서는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시카고미술관 소장) 등 국내에 잘 알려진 호퍼의 대표작들이 생각보다 많이 오지 않아 아쉽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외로움’을 넘어 호퍼의 작품 세계를 깊게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다시 오지 않을 드문 기회다. 초기작부터 말년 작품까지 거장의 붓 터치를 직접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며 작가가 어떻게 예술을 성숙시켜 나갔는지 알 수 있어서다. 전시는 8월 20일까지 예약제로 유료 관람이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