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 남쪽 장원에서(題都城南莊)


지난해 오늘 이 문 앞에서
사람 얼굴 복사꽃 서로 비쳐 붉었는데
어여쁜 그 얼굴은 어디로 가고
복사꽃만 예처럼 봄바람에 웃고 있네.


去年今日此門中 人面桃花相映紅
人面不知何處去 桃花依舊笑春風


* 최호(崔護) : 당나라 시인
등려군 노래에 이렇게 애절한 사연이…

복사꽃처럼 발그레한 그 얼굴

짧고 간명하면서도 긴 여운을 주는 시죠? 작품 속에 숨겨진 사연이 더욱 흥미를 끕니다. 시인이 청년 시절에 겪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어느 해 청명절(淸明節), 그는 도성 남쪽으로 놀러 갔다가 복숭아꽃이 만발한 농장(農莊)을 발견했습니다. 갈증이 나서 대문을 두드렸더니 복숭아꽃처럼 예쁜 아가씨가 문을 열어줬지요. 물그릇을 가져오는 모습이 복사꽃처럼 곱고 발그레했습니다.

아가씨를 잊지 못하던 그는 이듬해 다시 그 농장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지요. 복숭아꽃은 예전처럼 흐드러지게 피었건만, 대문은 잠겨 있고 아가씨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누를 수 없었죠. 그는 대문에 시를 한 수 적어 놓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게 오늘 소개한 시입니다.

이 사연은 『본사시(本事詩)』와 『태평광기(太平廣記)』 등에 실려 있습니다. 원나라 때는 ‘최호알장(崔護謁漿)’이라는 제목의 잡극(雜劇)으로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다고 하네요.

덧붙여진 이야기도 있습니다. 며칠 뒤 그가 다시 찾아갔는데 안에서 곡성이 들렸다고 해요. 무슨 일인가 하고 기웃거리는데, 한 노인이 나와서 “내 딸이 문에 붙은 시를 읽고는 병이 나서 죽었네”라고 하지 뭡니까.

충격을 받은 그는 곧 빈소로 들어갔습니다. 그러고는 누워 있는 딸을 보고 “나 여기 왔소” 했더니 딸이 금방 눈을 뜨고 살아났다고 해요. 아가씨와 결혼한 그는 머잖아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고…

시 원문에 나오는 ‘인면도화(人面桃花)’는 복숭아꽃처럼 어여쁜 여인의 모습을 뜻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뜻이 달라져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 상황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굳어지게 됐지요.

경치는 예전과 같지만 그 아름다움을 함께하던 연인이 곁에 없는 경우에도 쓰는 말입니다. 등려군이 부른 애절한 노래 ‘인면도화’가 이 시에 곡을 붙인 것이지요.

예부터 복숭아는 젊은 여인을 상징했습니다. 복숭아를 소재로 한 것으로 가장 오래된 시 ‘도요(桃夭)’도 그렇습니다.

어여쁜 복숭아나무
곱고 고운 꽃이로다
이 아가씨 시집가면
그 집을 화목케 하리

어여쁜 복숭아나무
많고 많은 열매로다
이 아가씨 시집가면
그 집을 화순케 하리

어여쁜 복숭아나무
그 잎이 무성하네
이 아가씨 시집가면
그 집안을 화목케 하리.

桃之夭夭 灼灼其華 之子于歸 宜其室家
桃之夭夭 有蕡其實 之子于歸 宜其家室
逃之夭夭 其葉蓁蓁 之子于歸 宜其家人

『시경(詩經)』에 나오는 이 시는 싱싱한 복숭아나무와 화려한 꽃, 많은 열매, 무성한 잎을 통해 시집가는 아가씨의 집안 화평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아들딸 낳고 잘 살라는 축혼가(祝婚歌)이기도 하지요.

여기서도 복숭아꽃·열매·잎은 모두 여성을 상징합니다. 도(桃)는 여인을 복숭아꽃에 비유한 것이고 요(夭)는 젊고 아름답다는 뜻이며 귀(歸)는 시집간다는 뜻이죠.
복숭아꽃 필 무렵 불어난 시냇물을 도화수(桃花水)라고 하는데 그 모습도 아름다운 아가씨와 무릉도원을 닮았습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