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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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이미상의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 앞에 ‘여유로운’이란 형용이 필요할 테고, 삶에서 그 형용사를 얻어내기가 그리 만만치 않다는 걸 우리는(여기에서 우리란 이미 이미상을 읽은 당신과 나를 가리킨다) 알고 있다. 거기엔 어떤 의지와 많은 노력과 비용도 필요하다는 것 또한.

아마도 문학은 인간이 누려야 할 ‘여유로운 시간’을 점잖게 때우는 저비용 고가치 중 하나로 고안된 게 아닌가 싶다. 문학은 우리에게 여유로운 ‘시간’을 요구하지만, 그렇다고 문학이 우리에게 여유를 가져다주진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문학에서 여유를 찾지만, 문학은 우리에게 여유조차 허락할 입장이 아니다. 오히려 문학은 굉장히 번잡하고 피로한 ‘근로’를 우리에게 요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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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상의 소설을 읽는다는 건 여유로운 시간의 셋팅값을 요구한다. 바쁜 와중에, 쉴 겨를이 없을 때,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그 소설은 읽히지 않는다. 반대로 한가할 때나 이제 좀 짬이 날 때, 사람들 속에서 벗어나 혼자가 될 때에나 이미상의 소설이 읽힌다.

그렇다고 이미상의 소설이 순순히 그 여유에 조응하냐 하면 꼭 그렇진 않다. 막상 그 소설 안으로 입장하고 나면 꽤 복잡하고 번잡한 세계를 해석하고 읽어내야 하는 번거로운 ‘일’이 된다.

활자는 평면으로 읽히고 내용은 입체적으로 저장되어야만 하기 때문일까. 안 그래도 마음 사정의 과부하로 좀 여유롭게 소설(따위)이나 읽고자 하는데, 이런 복잡한 인풋과 선별적 아웃풋의 뇌의 활성화를 또 컨트롤해야 하는 노동이라니. ‘여유롭게’라는 의미는 이미 망각된 채, 또다시 뇌의 피로도가 올라간다. 하지만 가려진 이야기의 장막을 걷어내고픈 욕망을 충족하고자 무의미적으로 손가락들이 페이지를 넘기고 또 넘길 뿐이다.

출판사 문학편집자인 나에게도 이미상의 소설을 읽는 건 꽤 번거로운 일에 속한다. 그 일이 일상적으로 되풀이되고 반복되어져 익숙할 뿐.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처음에 이미상의 소설을 만났을 때 어떤 결심과 목적에 의해 읽기보다는 선반에 놓인 야채들의 싱싱함의 유무를 판단하고자 들춰보려는 습관 같은 읽기에 가까웠다.

특히 신인작가의 작품이라면 더더욱 견고하고 높은 기대치로 판별하게 되는데, 당연하게도 크고 실한 것에 손이 가듯 철저한 감별사의 입장이 되어 작품을 읽어나갔다. 첫거래를 터도 될지 말지가 바로 이 순간 결정된다는 비장함마저 들기도 했다.

그런 직업의식이 투철한 감별사에게도 갑자기 순순한 읽는 자로 둔갑되는 순간이 있다. 소설의 엄격한 기준, 상업적 판단, 작품의 문학적 의미 등의 잣대가 쓸데없이 보일 때,
아마도 이미상의 <이중 작가 초롱>이 그러했던 것 같다. 그냥 쭉, 읽었다.

범상치 않았던 것 같다. 범상하게 접근했던 나를 혼내키는 것 같다고 할까. 문학의 언어를 비틀고 복잡하게 꾸려진 인물들의 사정과 대화들에서 정치·문화적 윤리의 문제들이 토로된다. 문장들이 소비되면서 하나의 상을 만드는데, 마치 레고 블럭들이 점점 곁에서 없어지고 부분과 조각들이 모여 거대한 오브제가 내 앞에 서 있을 때의 뿌듯함이 있다. 수시로 서술자가 바뀌어 혼란한데도, 카메라 앵글이 양방향으로 돌아가 산만한데도 무언가 신뢰감 있는 화자의 목소리가 난세를 꿰는 밧줄이 되어준다.

아마도 이미 경험한 독자들은 공감할 것이다. 이미상이 부려놓은 소설의 상황 속으로 무작정 끌려들어가며 ‘이 소설 왜 이리 안 읽히지?’ ‘대체 이 인물이 뭐라는 거야?’ 같은 느낌들 말이다. 핵심을 곧장 말하지 않지만 큭큭 대며 범속한 이들의 마음이 이해되는 내가 속물인가 싶어 좀 씁쓸한 자기위안이 되기도 한다.

그밖에 평면에 펼쳐진 활자들을 읽어가는 속도와 나의 뇌에 저장되는 속도가 엇나가 호두나 견과류 같은 뇌에 좋은 음식들을 찾아보게 되고, 읽어들이는 내용보다 저장되는 과정에서의 복잡한 연상과 상상이 개입해 꽤 난잡한 정보값들이 두서없이 기억됐다. 그동안 굳건했던 내 낡은 읽기 방법론이 흔들리는 불안감 또한 느낄 수 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이러는 건지 답답하겠지만, 소설 내용을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 복잡함 속에 산발적으로 아름답게 피어 있는 이중삼중 플롯과 상호텍스트성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다 전달되지도 말해지지도 못할 답답함 때문이기도 하다.

그나마 그 번거로움을 이미 알고 있는 독자들을 제외하고 아직 이미상을 접해보지 못한 독자들의 좀 덜한 번거로움을 위해 하나의 팁을 말하자면, 우연하게 만나게 되는 ‘문학적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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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이제 이미상을 알고 있는 당신과 나)는 이 번거로운 일들을 왜 굳이 시간을 들여 하는 것일까? 조금 비틀어 우리는 왜 이런 번거로움에 빠져드는가?

뇌과학적, 신경학적인 대답들이 우선 먼저 떠오르지만,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쉽게 말해 번거로움 속에서 발견되는 ‘우연한’ 재미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이퍼리얼리즘적 복잡한 사정들이 우연한 계기로 스르르 풀려나오는 재미. 범속한 일상이 우연하게도 큰 사건으로 되어가는 재미. 인간들이 구체적으로 세운 계획과 촘촘한 추측들이 우연보다 못하고 틀어지며 어긋나는 다종다양한 이야기들의 출발과 결말 등등. 그러한 세세한 과정들의 궤적이 아마도 이런 우연한 문학적 ‘재미’에 버무려져 이미상의 소설이 읽히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이건 아주 작은, 미세한 팁에 불과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