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셔츠 차림의 눈 큰 아이…어느날 '검은 초대장'을 보냈다
스페인 출신 현대 미술가 중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하비에르 카예하(52). 해맑은 얼굴에 커다란 눈을 말똥말똥 뜬 아이가 티셔츠에 적힌 간결한 문구로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한 인물화로 잘 알려져 있다. 한때 ‘제2의 나라 요시토모’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던 작가는 이제 누구나 쉽게 알아보는 그만의 뚜렷한 작품 세계를 선보이며 메이저 경매와 미술관 전시를 오가는 현대미술의 주요 아티스트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다.

2월의 어느 날. 세계 각지의 카예하 애호가와 작품 소장가들은 그의 스튜디오가 보낸 ‘검은 봉투’를 받았다. 봉투에는 작가의 반려묘를 캐릭터화한 ‘Mr. Gunter’로 꾸며진 초대장과 종이인형이 동봉돼 있었다. 작가는 일본과 캐나다 미술관에서 개인전 ‘Mr. Gunter. The Cat Show’를 성공리에 마치고, 그의 고향이자 마지막 순회지인 말라가에서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말라가 지역신문에 실린 카예하의 드로잉.
말라가 지역신문에 실린 카예하의 드로잉.
카예하는 이 특별한 초청장으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가 파블로 피카소가 태어난 곳이자, 완벽한 21세기형 아티스트인 그가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문화도시 말라가로 예술 애호가들을 초대하는 환상적인 여행을 예고하고 있었다.
카예하의 캐릭터로 장식된 택시.
카예하의 캐릭터로 장식된 택시.
필자를 포함해 이 특별한 초대를 받은 260명의 카예하 애호가들은 약속 날짜인 3월 3일 전 세계에서 말라가로 모여들었고, 도시 전체가 방문객들을 환영했다. 역사지구를 가로지르는 세르반테스 애비뉴에는 ‘Mr. Gunter’ 전시 현수막이 야자수 잎과 함께 나부끼고, 그 아래에는 온통 카예하의 어린아이 얼굴로 뒤덮인 시내버스가 쾌활하게 달리고 있었다.

시내 곳곳의 레스토랑과 상점은 물론 초대객들이 묵을 호텔 이곳저곳에 사랑스러운 눈을 가진 카예하의 창조물들이 뿜어내는 해피 바이러스가 가득했다. 호텔 방에 준비된 모든 어메니티와 소품엔 Mr. Gunter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탁자 위에 놓인 말라가 지방 신문의 오늘 자 1면. 페이지 전체에 카예하의 드로잉과 전시 소식이 등장했다.
말라가 길거리에 걸린 카예하 전시 현수막.
말라가 길거리에 걸린 카예하 전시 현수막.
피카소의 도시 말라가는 하비에르의 명성 또한 그토록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한쪽에 소개된 대가(피카소)의 서거 50주년 기념 전시 정보 기사에 카예하는 ‘Soy Picasso(나는 피카소)’라는 문구를 곁들인 초상을 그려 넣었다. 거장에 대한 존경과 그를 닮고 싶은 작가의 소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마나 위트 있는 표현인가.

말라가 중심가 도처에서 카예하의 손길을 느끼며 전시가 열리는 우니카하재단 문화센터(Fundacion Unicaja)로 향했다. 재단이 상주하고 있는 곳은 대성당 옆에 자리한 18세기 바로크 양식의 주교관 건물로, 말라가 주요 역사 건물 중 하나다. 18년 전 다른 미술가들의 전시 설치를 돕는 일을 하며 언젠가 유서 깊은 이곳에서 자신의 전시를 올리리라 마음먹었던 젊은 예술가의 꿈이 마침내 실현된 순간이었다. 이 전시 및 이벤트를 위해 95명의 스태프와 17개의 기업이 참여했고, 209점의 회화와 조각, 드로잉, 한정판 아트 토이 등이 7개국에 있는 20개의 컬렉션에서 특별히 대여됐다.

해외 및 스페인 유명 인사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재단 건물 안마당에는 등신대의 Mr. Gunter 조각이 방문객을 반겼다. 팝문화의 최전선, 귀엽기 그지없는 창작물들과 웅장한 바로크 양식 천장화가 만들어내는 간극은 전시를 더 극적으로 보이게 했다.
전시장에 설치된 ‘이곳에 아트 금지(No Art Here)’.
전시장에 설치된 ‘이곳에 아트 금지(No Art Here)’.
에디션 조각으로도 잘 알려진 ‘No Art Here(이곳에 아트 금지)’ ‘Heads(머리들)’를 비롯해 ‘Mickey Mouse(미키마우스)’ ‘Little Maurizo(작은 마우리치오)’ ‘Thinking Boy(생각하는 소년)’ 등 작가의 시그니쳐 대형 조각도 위엄을 뽐냈다.
연필 든 소년(Pencil boy).
연필 든 소년(Pencil boy).
벽 한 면 전체가 드로잉으로 가득 채워진 전시장에는 작가의 분신과 같은 ‘Pencil boy(연필 든 소년)’ 조각이 구겨진 종이와 스케치북, 널브러진 색연필 사이에 늠름하게 서 있었다. 바로 옆에 걸린 대형 회화의 ‘You Have No Choice(넌 선택의 여지가 없어)’ 문장은 지칠 법한 작가를 독려하는 듯했다. 작품의 색채와 형태 등 조형적 조화를 꾀해 구성된 세노그래피(전시디자인)는 함께 배치된 작품 간의 대화를 상상하도록 만들며 적극적이고 유머 넘치는 감상을 자극했다. 사이즈 대비를 즐기는 작가는 200㎝에 달하는 회화와 높이 30㎝의 아담한 작품을 나란히 전시하는 식으로 양극단이 주는 효과를 최대화했다. 작가의 초대형 회화 작품 ‘The Future is Now(미래는 지금)’를 더불어 이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여섯 점의 최신작도 함께 볼 수 있었다. 마법 같은 순간, 즉 사람들이 예술 작품을 보고 ‘와’ 감탄을 발하는 순간을 찾는다고 말하는 카예하는 말라가에 딱 그런 전시를 이뤄냈다.

카예하의 갤러리스트 시지 난주카는 한 인터뷰에서 “다양한 문화와 역사가 공존하는 말라가가 하비에르에게 자유분방하고 유연한 정신을 준 것 같다”고 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개방적인 그의 예술은 그런 의미에서 ‘스페인적’이기보다는 ‘말라가적’이다. 파블로 피카소가 유년 시절을 보내며 예술혼을 키운 곳, 카예하가 모두를 위한 아트를 꽃피워낸 곳, 퐁피두센터와 피카소미술관을 비롯해 열 개가 넘는 순수 미술 기관이 존재하는 문화도시 말라가에서 미적 감각을 드높이는 여름 바캉스를 보내는 것은 어떨지. 작가의 전시는 오는 9월 6일까지 이어진다.

말라가=손혜정 아트 어드바이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