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불에 타고 염소·돼지 농장도 피해…주민들 '허망'
화마에 삶의 터전 잃은 주민들…뜬눈으로 대피소서 하룻밤
산불로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충남 홍성군 서부면 주민들은 서부초등학교 등에 마련된 대피소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양곡리 주민 박영순(86) 씨는 화마에 64년의 추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다.

이곳에 시집와 64년간 살았던 옛집과 그 옆에 새로 지은 새집이 모두 타버렸기 때문이다.

"22살에 시집와서 힘든 고생 하며 살았던 집인데 다 탔어. 이젠 못 먹고, 못 입게 됐어. 딸들이 사준 옷도 아까워서 못 입고 넣어놓기만 했는데 아까워서 어째. 딸들이 주고 간 용돈도 다 타버리고…"
박씨는 전날 오후에 화마가 휩쓸고 간 집터를 다시 찾아갔지만, 다리가 떨려서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렸다고 전했다.

눈가에 눈물이 고인 박씨는 "너무 속상해서, 속이 타들어 가서인지 눈앞이 잘 안 보인다"면서 "난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양곡리에 사는 50대 정모 씨도 집과 비닐하우스 한 동이 모두 불에 탄 채로 대피소로 피신했다.

정씨는 "한마디로 표현해서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라며 "어제는 경황 없이 몸만 나왔는데, 이후 순식간에 연기랑 불길이 심해지더니 집이 모두 타버렸다"고 허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화마에 삶의 터전 잃은 주민들…뜬눈으로 대피소서 하룻밤
집까지 불이 번지는 걸 겨우 막았다는 양곡리 주민 김정자(86) 씨는 "비료도 타고 비닐하우스도 타고 마당도 다 탔는데, 집까지 불이 번지려는 걸 아들래미 친구가 와서 직접 불을 꺼서 막아줬다"면서 "혈압약을 집에서 못 가져와서 지금 심장이 두근거리고 속이 안 좋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홍성 산불로 군 지정문화재인 양곡사와 안에 있는 조선 후기 유학자 남당 한원진 선생의 사당이 모두 불에 탔는데, 한원진 선생 집안의 며느리인 조순근(78) 씨도 겨우 몸만 피했다고 전했다.

조씨는 "우리 신랑 집안 사당인데 여기도 불에 타버려서 마음이 상당히 좋지 않다"면서 "하루아침에 조상의 사당이 불에 타버려서 허탈하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여전히 무서움에 떨고 있었다.

주민의 손녀딸인 박모(25) 씨는 "할머니랑 어제 집에 갔다가 밤새 다시 불이 살아나서 또 대피소로 왔다"면서 "할머니가 당분간은 무서워서 집 근처는 못 갈 것 같다고 하셨다"고 털어놨다.

함수일(69) 씨도 이번 산불로 자식같이 키우던 돼지 860마리를 잃었다.

화마에 삶의 터전 잃은 주민들…뜬눈으로 대피소서 하룻밤
불이 났다는 소식에 우선 혼자 사는 어르신의 대피를 도운 뒤 자신의 농장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불길이 농장을 삼킨 뒤였다.

이날 찾아간 그의 축사는 까맣게 타 뼈대만 남았고, 농장 바닥엔 돼지 사체가 곳곳에 있었다.

함씨는 "이미 불바다가 돼 손 쓸 수 없었다"며 "돈을 떠나서 직접 키우던 짐승을 잃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염소농장을 운영하는 최정화(60) 씨도 집 두 채와 농기계, 키우던 염소 등 전 재산을 잃었다.

그는 "남은 건 지금 입고 있는 이 한 벌 뿐"이라고 한탄했다.

화마에 삶의 터전 잃은 주민들…뜬눈으로 대피소서 하룻밤
전날 농장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와보니, 이미 불길이 거셌고 놀란 염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이 염소들은 그가 20여년 동안 일군 자산이다.

염소 400여마리 가운데 70여마리 염소가 불에 타 죽었지만, 살아남은 염소들 상황도 좋지 않다.

최씨는 "남은 염소들도 호흡기에 화상을 입어 곧 죽을 수 있다"며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저 답답할 뿐"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