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의 소설집 '반에 반의 반' 출간…"몸을 통한 여성서사 마침표"
진화생물학 공부하며 남극행…"동물, 지구생태 등 새로운 이야기로"
천운영 작가 "이해하고 사랑한 여자의 삶, 다정함의 역사죠"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에서 출발했는데 도착해보니 늙은 여자의 젖퉁이다.

"
천운영(52) 작가는 10년 만에 다섯 번째 소설집 '반에 반의 반'(문학동네)을 펴내며 '작가의 말'에 이렇게 썼다.

지난 20여년간 몸의 서사로 여성을 탐구한 작가다운 도발적인 정리다.

2000년 그의 등단작 '바늘' 속 여자는 가장 강한 걸 문신으로 새겨달란 남자의 말에 바늘을 그려 넣었다.

작가는 바늘을 여성의 '얇은 틈새'에 빗댔다.

그곳이 원초적이고 강한 생명력의 근원이라 여겼다.

그리고 이번 소설집에선 할머니의 젖가슴에서 세상을 다정하고 평화롭게 만드는 힘을 발견했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천운영은 "자식은 물론 남의 아이에게도 젖을 내주는 것만큼 강력한 연대가 있을까"라며 "할머니 젖퉁이 같은 너른 품성이 있다면 세상이 더 다정하고 평화로워질 것 같았다.

이런 지점에 도달하자 제 몸을 통한 여성 서사가 비로소 마침표를 찍었다"고 했다.

소설집은 글을 쓴 20여 년과 생애주기를 같이 한 듯하다.

데뷔 초기 전복적이고 송곳 같았던 그가 소설을 쓰면서 '나'를 알아가고, 어느새 다정한 사람이 되어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계속 날 선 상태로 늙으면 꼰대가 된다"고 생각했다.

9편의 수록작들에선 자전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우리 할머니와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두 이름, 기길현 할머니와 명자 씨는 실제 작가의 할머니, 엄마 이름에서 따왔다.

가족 제사 등 집안에서 겪은 일과 인물도 모티프가 됐다.

천운영은 "'엄마처럼 희생하고 안 산다'는 게 1990년대 여자들의 목소리"라며 "하지만 희생의 밑바탕엔 가족을 지키려는 굳건한 여자의 힘이 있었다.

그런 엄마들의 평범한 삶이 특별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 역사에는 사회적, 역사적 맥락이 나이테처럼 쌓여 있다"고 했다.

그는 희생으로만 정의할 수 없는 할머니, 엄마의 삶에서 가장 환한 순간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걸 직조하는 게 "소설가의 몫이고 우리 세대 딸이 할 수 있는 몫"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보고 들은 얘기에 '반에 반의 반' 만큼의 상상을 더했고 그 상상이 다정하고 아름답고 화사하길 바랐다.

천운영 작가 "이해하고 사랑한 여자의 삶, 다정함의 역사죠"
단편들은 개별 이야기처럼, 할머니와 딸·그 딸의 딸로 이어진 연작으로도 읽힌다.

그는 "이들이 이해하고 연대하고 사랑하는 힘을 포괄하는 단어는 다정함"이라며 "소설집은 다정함의 역사"라고 했다.

길현 할머니는 말 품새가 불퉁스럽지만, 배 곯던 시절 이웃에 떡을 해서 돌린 인심으로 6·25 전쟁 한가운데서 남편을 구해냈다('반에 반의 반'). 시아버지 후취 순임과 함께 간 꽃놀이에서 만난 오갈 데 없는 어린 오누이를 결국 집안에 들이고 새 명주 이불을 내어준 것도 그다('우니', '봄밤'). 그런 할머니 장례식에서 고인을 추억하던 자식들은 한 번씩은 입에 물고 조물조물 만졌던 젖가슴을 얘기하다가 눈가가 촉촉해진다('내 다정한 젖꼭지').
천운영은 "할머니가 떡을 해 돌린 건 실제 얘기"라며 "개인의 서사지만 비단 한 가족 얘기만은 아니다.

옆집 얘기도 우리 집과 비슷한 게 현실이다.

흐트러져 있는 삶이 사회적 맥락에서 하나의 풍경으로 그려지길 바랐다"고 했다.

동명이인으로 등장하는 두 명자는 얼핏 선명하게 다른 삶이다.

한국의 명자는 어린 나이에 가부장적인 남자와 결혼해 위장 이혼까지 했고('아버지가 되어주오'), 미국의 명자는 사랑을 쏟아준 남편과 사별하며 조기 폐경이 왔다('명자씨를 닮아서'). 그러나 모두 남편 중심적인 질서에서 그 삶이 움직여졌다는 점에선 별반 다르지 않다.

천운영은 "'내 엄마의 가장 환한 순간은 언제일까'란 생각을 하다 명자 씨 서사에 집착했다"며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은 엄마의 기억이 조금씩 뒤로 밀리는 것도 영향을 줬다"고 했다.

천운영 작가 "이해하고 사랑한 여자의 삶, 다정함의 역사죠"
그는 이 중 두 편을 남극에서 썼다.

쇄빙선을 타고 남극으로 가면서 한편, 장보고 기지에서 낮엔 연구하고 밤에 소설을 쓰며 또 한 편을 완성했다.

그는 꽤 오래 다른 길에 있었다.

지난 10년간 남극행만 세 차례. 201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으로 남극 세종기지를 처음 경험한 뒤 이듬해 정지우 감독과 다큐멘터리 촬영 차 다시 찾았다.

또다시 남극에 가고자 그는 이화여대 에코과학부에서 진화생물학 중 동물행동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연구자의 몸으로 남극에 가 2021년 12월부터 5개월간 물범 연구를 했다.

2016년에는 연남동에 스페인 가정식 식당 '돈키호테의 식탁'을 차리기도 했다.

엄마와 함께 사람들에게 '밥을 해 먹이는' 일을 하다 2년여 만에 문을 닫은 뒤 산문집 두 권(2021)을 썼다.

"엄마가 겁대가리가 없다고 했죠. 이게 방황인지, 외도인지 싶었는데 딴짓은 아니었어요.

지금의 다정함으로 오는 길엔 타인에게 밥을 해 먹이는 순간도, 남극의 시간도 필요했죠. 다시 쓰려고 걸어온 길이죠."
'내 몸의 서사'라는 한 문장을 끝낸 그는 이제 새로운 문장으로 넘어갈 생각이다.

남극의 동물, 지구 생태, 우주 등 새로운 경험을 담은 동화와 소설을 쓰려 한다.

그는 "23년간 쓰면서 이제 리듬을 찾았다"며 "할머니들 구술처럼 문장을 읽으면 딱딱 리듬이 되는 상태가 된 게 기분이 참 좋다.

내 목소리를 찾았으니 얘깃거리를 재미나게 들려주고 싶다.

앞으로 오래 쓸 것 같다"고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