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강진 현장] 한국전 파병 첫 출항지 '인연' 항구도시도 처참하게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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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이주 이스칸데룬, 참혹 그 이상…시신 찾고도 슬퍼하지 못하는 사람들
담요로 싼 시신 길바닥에 방치…시민들, 가족 생사 모른 채 구조현장서 '발동동'
끊어진 고속도로·치솟는 불길·사이렌 굉음…건물 잔해 언덕들, 대피·구조 행렬 대혼잡
'살아남은 자'들, 차에서 밤지새우며 추위와 싸움…절실한 배급행렬, "희망 없다" 절규도 튀르키예 강진 현장은 전쟁터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함 그 자체였다.
심각한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가슴이 답답하고 말문이 막히는 상황에 잠시 멍해지기를 반복했다.
지진 후 사흘째인 8일(현지시간) 이번에 가장 피해가 심한 지역 중 하나로 꼽히는 튀르키예 남부 하타이주의 지중해 항구도시 이스켄데룬을 찾았다.
오후 3시쯤 아다나 공항을 떠나 차로 2시간여를 달리자 고속도로가 끊어진 곳이 나왔다.
본격적으로 지진 피해 지역임을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맞은 편 차선을 나눠 양방향 통행이 가능했던 덕분에 계속 차가 달리자 멀리서 검은 연기가 보이기 시작했고, 그 순간 구급차 4대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줄지어 달려갔다.
잠시 후 도착한 이스켄데룬 항구에선 지진 여파로 컨테이너 야적장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해 검붉은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다.
매캐한 연기와 냄새가 항구를 뒤덮고 있었다.
계속해서 달려오는 소방차와 구급차가 차량 행렬과 뒤엉켜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을 내고 있었다.
살수차와 헬리콥터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진화 작업을 벌였지만 힘에 부치는 모습이었다.
이스켄데룬은 한국과도 각별한 인연을 가진 도시다.
'형제의 나라' 튀르키예가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9월25일 우리를 돕기 위해 파병한 병사들이 처음 출항했던 곳이 바로 이 곳 이스켄데룬 항구였다.
이스켄데룬에는 한국전쟁 파병을 참전 기념비도 세워졌다.
그러나 취재진이 찾은 이스켄데룬 시내는 이미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다.
건물의 불이 모두 꺼진 채 텅 비어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건물이 완전히 부서져 그 잔해가 언덕을 이루고 있었고, 쓰러진 건물이 이면 도로를 덮쳐 차량이 내비게이션을 따라 이동할 수가 없었다.
쓰러지기 직전처럼 기울어진 건물도 셀 수 없이 많았고, 벽면과 베란다가 부서져 없어진 정도면 멀쩡한 편에 속했다.
불 꺼진 건물과 반대로, 거리는 도시를 떠나는 차량과 구급차, 소방차이 뒤엉키면서 거대한 주차장이 됐다.
구조 작업 현장의 불빛이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시내 어딜 가나 사이렌이 울렸고 경광등이 번쩍였다.
자욱한 먼지와 중장비의 매연으로 숨 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수색 현장에서는 가족을 기다리는 이들이 모닥불에 의지해 추위를 피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만난 휘세인 씨는 무너진 건물에서 어머니가 구출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다행히 전날 구출됐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생사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지내던 할아버지는 이번 지진으로 숨졌다고 한다.
그는 할아버지의 소식을 묻는 취재진에게 덤덤한 표정으로 뒤편을 가리켰다.
방금 전에 수습한 시신이라고 했는데, 담요에 싸인 채 인도 위에 놓여 있었다.
시신이라고 말을 해도 절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냥 길바닥에 방치된 상태였다.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이지만 아직 돌아오지 못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미처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현장 작업 반장인 무스타파 씨는 사흘 동안 8명을 구조했지만, 수습한 시신은 38구였다고 말했다.
건설사 중장비 관리자인 그는 이번 사고 직후 자신이 이끌고 있는 10개 팀과 트럭 20대, 각종 중장비를 동원해 현장에서 자원 봉사에 나섰다.
무스타파 씨는 "앞에 보이는 건물에 어린이가 4명이 있다.
빨리 구조하고 싶지만 장비도 인력도 연료도 모두 부족하다"고 호소했다.
주거 지역의 한 경찰서 앞에선 봉사자들이 큰 트럭에서 물과 휴지, 옷가지 등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있었고, 이를 받으려는 행렬이 수십m 이어지고 있었다.
주유소는 차량 1대당 400리라(약 2만6천원)로 판매량을 제한했다.
골목 구석구석엔 차에서 밤을 지새는 가족들이 보였다.
두툼한 옷을 껴입고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힘겹게 추위와 싸우고 있었다.
한 주차장에선 대형 트레일러 안에 유모차와 가족들이 보였다.
세 살 정도 어린이가 찢어지게 울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달랠 힘도 없는 듯했다.
아버지로 보이는 이는 텅 빈 트레일러 앞에서 무엇이라도 방한이 될 만한 물건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이미 최악의 재앙이 닥쳤지만, 국제사회의 더욱 신속하고 적극적인 도움 없이는 더 큰 비극이 불가피해 보였다.
복구 현장에서 만난 부쉬라 씨는 "재앙"이라고 말했고, 부쉬라씨의 언니는 "우리는 이제 희망이 없다"고 절망했다.
/연합뉴스
담요로 싼 시신 길바닥에 방치…시민들, 가족 생사 모른 채 구조현장서 '발동동'
끊어진 고속도로·치솟는 불길·사이렌 굉음…건물 잔해 언덕들, 대피·구조 행렬 대혼잡
'살아남은 자'들, 차에서 밤지새우며 추위와 싸움…절실한 배급행렬, "희망 없다" 절규도 튀르키예 강진 현장은 전쟁터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함 그 자체였다.
심각한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가슴이 답답하고 말문이 막히는 상황에 잠시 멍해지기를 반복했다.
지진 후 사흘째인 8일(현지시간) 이번에 가장 피해가 심한 지역 중 하나로 꼽히는 튀르키예 남부 하타이주의 지중해 항구도시 이스켄데룬을 찾았다.
오후 3시쯤 아다나 공항을 떠나 차로 2시간여를 달리자 고속도로가 끊어진 곳이 나왔다.
본격적으로 지진 피해 지역임을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맞은 편 차선을 나눠 양방향 통행이 가능했던 덕분에 계속 차가 달리자 멀리서 검은 연기가 보이기 시작했고, 그 순간 구급차 4대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줄지어 달려갔다.
잠시 후 도착한 이스켄데룬 항구에선 지진 여파로 컨테이너 야적장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해 검붉은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다.
매캐한 연기와 냄새가 항구를 뒤덮고 있었다.
계속해서 달려오는 소방차와 구급차가 차량 행렬과 뒤엉켜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을 내고 있었다.
살수차와 헬리콥터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진화 작업을 벌였지만 힘에 부치는 모습이었다.
이스켄데룬은 한국과도 각별한 인연을 가진 도시다.
'형제의 나라' 튀르키예가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9월25일 우리를 돕기 위해 파병한 병사들이 처음 출항했던 곳이 바로 이 곳 이스켄데룬 항구였다.
이스켄데룬에는 한국전쟁 파병을 참전 기념비도 세워졌다.
그러나 취재진이 찾은 이스켄데룬 시내는 이미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다.
건물의 불이 모두 꺼진 채 텅 비어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건물이 완전히 부서져 그 잔해가 언덕을 이루고 있었고, 쓰러진 건물이 이면 도로를 덮쳐 차량이 내비게이션을 따라 이동할 수가 없었다.
쓰러지기 직전처럼 기울어진 건물도 셀 수 없이 많았고, 벽면과 베란다가 부서져 없어진 정도면 멀쩡한 편에 속했다.
불 꺼진 건물과 반대로, 거리는 도시를 떠나는 차량과 구급차, 소방차이 뒤엉키면서 거대한 주차장이 됐다.
구조 작업 현장의 불빛이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시내 어딜 가나 사이렌이 울렸고 경광등이 번쩍였다.
자욱한 먼지와 중장비의 매연으로 숨 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수색 현장에서는 가족을 기다리는 이들이 모닥불에 의지해 추위를 피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만난 휘세인 씨는 무너진 건물에서 어머니가 구출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다행히 전날 구출됐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생사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지내던 할아버지는 이번 지진으로 숨졌다고 한다.
그는 할아버지의 소식을 묻는 취재진에게 덤덤한 표정으로 뒤편을 가리켰다.
방금 전에 수습한 시신이라고 했는데, 담요에 싸인 채 인도 위에 놓여 있었다.
시신이라고 말을 해도 절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냥 길바닥에 방치된 상태였다.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이지만 아직 돌아오지 못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미처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현장 작업 반장인 무스타파 씨는 사흘 동안 8명을 구조했지만, 수습한 시신은 38구였다고 말했다.
건설사 중장비 관리자인 그는 이번 사고 직후 자신이 이끌고 있는 10개 팀과 트럭 20대, 각종 중장비를 동원해 현장에서 자원 봉사에 나섰다.
무스타파 씨는 "앞에 보이는 건물에 어린이가 4명이 있다.
빨리 구조하고 싶지만 장비도 인력도 연료도 모두 부족하다"고 호소했다.
주거 지역의 한 경찰서 앞에선 봉사자들이 큰 트럭에서 물과 휴지, 옷가지 등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있었고, 이를 받으려는 행렬이 수십m 이어지고 있었다.
주유소는 차량 1대당 400리라(약 2만6천원)로 판매량을 제한했다.
골목 구석구석엔 차에서 밤을 지새는 가족들이 보였다.
두툼한 옷을 껴입고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힘겹게 추위와 싸우고 있었다.
한 주차장에선 대형 트레일러 안에 유모차와 가족들이 보였다.
세 살 정도 어린이가 찢어지게 울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달랠 힘도 없는 듯했다.
아버지로 보이는 이는 텅 빈 트레일러 앞에서 무엇이라도 방한이 될 만한 물건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이미 최악의 재앙이 닥쳤지만, 국제사회의 더욱 신속하고 적극적인 도움 없이는 더 큰 비극이 불가피해 보였다.
복구 현장에서 만난 부쉬라 씨는 "재앙"이라고 말했고, 부쉬라씨의 언니는 "우리는 이제 희망이 없다"고 절망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