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탓하는 가해자적 시선에 유가족·생존자 '주홍글씨'
정신과 진료도 눈치…"참사 트라우마, 사회적 문제로 인식해야 할 시점"
"부모님께 어렵게 말을 꺼냈더니 가장 먼저 돌아온 말이 '그러게 왜 그런 델 놀러 갔냐'는 거였어요.

그때부터 그곳에 있었단 얘기를 아무한테도 하지 않아요.

"
20대 직장인 이모 씨는 이태원 참사 당시 친구처럼 지내던 동생을 잃었다.

그는 사고 현장 건너편에 있어 다행히 변을 피했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씨는 그러나 무엇보다 괴로운 건 따로 있다고 했다.

바로 희생자와 생존자에 덧씌워진 '놀러 갔다 죽은 애들'이라는 시선이다.

◇ "'그런 곳' 왜 놀러 가서는"…손쉬운 '가해자적 시선'
지난달 29일 밤 사고를 전한 뉴스에 달린 댓글은 사상자를 탓하는 말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시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지자체에 대한 비판보다 희생자들을 향한 익명을 방패삼은 비난이 쏟아졌다.

'뻔히 사람이 몰릴 걸 알면서도 뭣 하러 가서 일을 당했냐'는 것이다.

한국갤럽이 이번 참사의 일차적 책임을 묻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 '그곳에 간 사람들'이라고 답한 사람은 14%였다.

대통령·정부(20%), 경찰·경찰 지휘부(17%)라는 답변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비율이다.

이씨는 '서양의 근본없는 명절'인 핼러윈에 '유흥가'인 이태원에 '놀러 간 철부지'라는 말이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주홍글씨처럼 새겨졌다고 했다.

그는 "자식을 잃은 부모님은 지금 '우리 애는 원래 착실했다'고 항변해야 상황"이라며 "놀러 간 게 죄도 아니고, 거기 있던 사람들이 범죄자도 아닌데 왜 욕을 먹어야 하느냐"고 말했다.

희생자를 탓하는 이러한 '가해자적 시선'은 참사의 재발 방지에도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대학생 이수빈(25)씨는 "대규모 인파가 몰릴 것이 예상됐는데도 제대로 대응하지 않은 정부 책임이 가장 큰 것 아니냐"며 "희생자 탓을 하는 건 성범죄 피해자에게 '그러게 왜 짧은 치마를 입고 밤에 돌아다녔느냐'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비판했다.

대학생 박지훈(22)씨는 "참사가 나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예방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했는지 살펴보는 게 먼저"라며 "그냥 손쉽게 '거기 간 사람 잘못'이라고 해버리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잘못된 시스템을 손보겠느냐"고 반문했다.

◇ "10·20대에 세월호, 코로나 연달아 겪은 고립 세대"
이번 참사를 계기로 최근 몇 년 간 한국의 청년세대가 처한 상황과 그들의 문화를 살펴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학생 이모(21)씨는 "20대가 소셜미디어(SNS) 세대라고는 하지만 그 누구보다 관계에 목마른 세대"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10대 때는 치열하게 입시 준비를 했고, 대학 가서는 코로나로 제대로 된 대학 생활을 하지 못했다"며 "3년 만에 거리두기가 풀려 들뜬 마음으로 주말 이태원에 나갔을 뿐"이라고 말했다.

박지훈씨는 "중학생 때 세월호 사건으로 수학여행이 취소됐다.

이번에 희생당한 20대들 역시 '세월호 세대'로 학창시절 수학여행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며 "대학에 가서는 코로나 때문에 동아리 활동이나 엠티(MT)도 못 갔다"고 항변했다.

10대엔 또래 수백명이 세월호 참사로 희생되는 것을 목격했고, 코로나라는 비정상적 상황을 거쳐 8년이 지난 20대엔 이태원 참사로 다시 한번 또래를 잃는 경험을 하게 된 이 세대를 기존의 잣대로 무신경하게 재단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 역시 비슷한 의견을 내놨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금 20대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거치며 신체적·정신적으로 가장 활발한 시기에 억눌렸다"며 "올가을 3년 만에 열린 대학축제에 전례 없이 많은 인파가 몰린 것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즐거움에) 목말라 있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고 현장에서 안전 문제나 위험을 탐지하는 건 정부의 몫"이라면서 "(정부가) 젊은 층의 억눌림과 갈망에 무관심했고 책임을 방기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도 "지금 20대는 수년간 고립됐다가 올해 2학기 들어서야 비로소 많은 인원이 모일 수 있게 되면서 빗장이 풀렸다"며 "공동체나 지역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함께 놀 만한 공간과 축제가 전무했던 것"이라고 짚었다.

◇ "멘탈 약하다" 시선에 정신과 진료받는 것도 눈치
그런데도 그날 이태원에 간 이에게 참사 책임을 돌리는 시선은 상당히 견고하다.

이 때문에 눈치 보며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한다.

30대 박모 씨는 참사를 코앞에서 목격한 뒤 3주간 상담을 받으러 정신건강의학과를 3차례 방문할 정도로 극심한 공포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연차휴가를 모두 쓴 그는 증세가 특히 심할 때는 병가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상사와 동료들이 박씨가 없는 자리에서 "그러게 왜 애들 노는 곳에 가서 일을 만드느냐. 시간도 많이 지났는데 그만하면 되지 않았느냐"고 얘기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이후부턴 "증상을 참으며 일을 나간다"고 했다.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 교사인 장모(32)씨는 사고 당시 이태원에 간 사실을 직장에 비밀로 하고 일요일에 문을 여는 서울의 정신과를 찾아 상담을 받았다.

장씨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핼러윈에 이태원에 갔다고 하면 특히 연배가 있는 동료 교사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게다가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한다고 하면 '요즘 젊은 선생들 (정신력이) 나약하다'는 소리를 들을까 괜히 겁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이번 사회적 참사가 정신질환의 심각성을 인지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 유럽에서도 정신질환을 개인의 나약함으로 보다가 베트남전을 계기로 트라우마와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면서 변화가 일었다"며 "우리가 지금 그 시점에 온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마음의 상처는 응급 처치가 굉장히 중요하다"며 "어떤 경우 휴식만으로도 일상을 살아갈 힘을 되찾기도 한다"고 조언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