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비트가 지난 15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비트가 지난 15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이고르 레비트(35)는 ‘요즘 잘나가는 피아니스트’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대상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로 좁히면 그의 이름값은 더 높아진다. ‘현존하는 최고의 베토벤 전문가’가 그의 별칭이니까. 실제 레비트는 베토벤 곡으로 오푸스 클래식상은 물론 저명한 클래식 음악잡지 ‘도이치 그라모폰’이 선정한 ‘올해의 아티스트상’까지 거머쥐었다.

그런 그가 베토벤 작품을 들고 한국 무대에 오르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비트의 첫 내한 독주회는 지난 15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첫 곡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부제로 두는 베토벤 소나타 17번이었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흘러나오는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의 이름 앞에 왜 ‘베토벤 전문가’란 수식어가 붙었는지 곧바로 알게 된다.

압권은 1악장에서 저음 파트는 무겁게, 고음 부분은 빠른 터치로 명료하게 연주한 대목이었다. 어두운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처절한 몸부림을 얼마나 적절하게 표현했는지, 마치 영화나 연극을 볼 때처럼 긴장했다. 3악장은 ‘출제자의 의도’대로 연주했다. 주선율에 힘을 주면서도 이를 꾸미는 주변음은 아주 가볍게 치면서 선율을 조화롭게 연주했다. 그 덕분에 베토벤의 작곡 의도가 그대로 청중에게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레비트의 손은 조금씩 급해졌다. 소나타 8번 ‘비창’부터였다. 베토벤이 처음으로 자신의 소나타에 표제를 붙인 이 곡의 관건은 ‘처연한 선율을 얼마나 잘 살리느냐’에 달렸다. 하지만 빠른 손놀림 탓에 처연해야 할 선율이 음미할 새도 없이 귀를 스쳐 지나갔다.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내야 할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에서도 그랬다. 가속이 붙으면서 왼손과 오른손의 합이 어긋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첫 곡을 연주할 때 그렇게 멋들어지게 선율을 쌓아나가던 그 피아니스트가 맞나 싶었다.

기교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레비트의 손가락 움직임은 신기에 가까웠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액셀러레이터를 조금만 덜 밟았다면, 베토벤 특유의 고독함과 장엄함이 살아나는 역대급 연주가 됐을 것이란 생각에.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