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후 8개월 속끓이다 영부인직 개편 폭탄선언
"개인 삶 살아야"…자국 넘어 전세계 영부인에 호소
영부인 역할은 내조?…고정관념 벗어던진 칠레 33세 퍼스트레이디
대통령의 배우자에게 '영부인 직'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퍼스트 레이디'가 나왔다.

남편 직업 때문에 개인이 삶이 망가져서는 안 된다며 미래 영부인들을 위한 제도 개혁까지 나선 밀레니얼 세대 인사로, 주인공은 가브리엘 보리치(36) 칠레 대통령의 여자친구인 이리나 카라마노스(33)다.

14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카라마노스는 지난달 초 기자회견을 열어 영부인직을 개혁한다고 밝혔다.

대통령 취임 이후 8개월간 침묵하다가 갑자기 기자회견을 열어 터뜨린 폭탄선언이었다.

재단 6곳 운영, 어린이 보육 네트워크, 과학 박물관, 여성개발조직 감독 등 영부인의 의무를 정부 부처들로 이전한다는 게 골자였다.

이러한 결정은 영부인도 개인으로서 자기 삶을 살 권리가 있다는 인식에서 나왔지만 단순한 의무 회피는 아니었다고 WP는 전했다.

카라마노스는 개혁된 제도가 자기 임기보다 오래 지속해 미래 영부인도 부담을 떠안지 않기를 바란다는 개혁 취지를 밝혔다.

나아가 영부인 개인의 자주성에 초점을 둔 이번 개혁의 정신이 전세계 다른 영부인에게도 전파되길 기대했다.

영부인 역할은 내조?…고정관념 벗어던진 칠레 33세 퍼스트레이디
카라마노스는 "대통령의 배우자는 배우자로서 선택된 것이지 재단의 대표로 선택된 게 아니다"고 말했다.

거리에서는 카라마노스의 이 같은 태도를 두고 뒷말이 무성하게 쏟아졌다.

태도가 불손하다거나 대통령 후보의 여자친구를 애초에 포기했어야 한다는 타박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카라마노스는 '소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카라마노스는 '대통령 좀 돌보라'는 얘기를 들을 때면 "물론 돌보기는 하지만 내가 안 돌보면 뭔 일이라도 생기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내가 안 돌보면 대통령이 대통령이 아닌 게 되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이 스스로 불충분한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다"고 강조했다.

카라마노스는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교육학, 인류학 학위를 취득했고 4개국어에 유창한 젊은 페미니스트 활동가이다.

WP는 영부인실의 직무가 카라마노스의 학위, 경력과 전혀 관계가 없으며 영부인은 그냥 간판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영부인 역할은 내조?…고정관념 벗어던진 칠레 33세 퍼스트레이디
세계 각국을 돌아보면 전통적인 영부인 모델에 도전을 던진 인사들이 종종 눈에 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배우자인 전직 모델 멜라니아 트럼프도 임기를 겨우 버텨낸 것으로 전해진다.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의 배우자 베아트리스 구티에레스 뮐러는 임기 중에 대학교수 생활을 지속했다.

뮐러는 "남편이 직업을 바꿨다고 내 직장마저 그만둘 필요가 있느냐"는 입장이었으나 대통령 외교행사에는 동행을 계속했다.

WP는 내조형 영부인의 글로벌 스탠더드는 미국에서 나와 중남미 등으로 확산했다고 소개했다.

미국 4대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1809∼1817년)의 배우자 돌리 메디슨이 영부인의 내조 개념을 주창한 것으로 전해진다.

존 F. 케네디(1961∼1963) 미국 3대 대통령의 배우자 재클린 케네디는 내조형 영부인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미국에서도 전통적인 영부인상을 거부하는 영부인이 있기는 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배우자 질 바이든은 백악관 입성 뒤에도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유급 영어작문 교사직을 유지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미국 역사에서 퍼스트레이디가 남편의 임기 중에 백악관 밖에서 돈을 받는 일을 하는 것은 유일하다고 밝힌다.

그러나 카라마노스는 질 바이든을 뛰어넘는 면이 있다.

영부인직 일부를 거부하는 것을 떠나 영구적인 개혁까지 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평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