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대학 선수 1천165명 중 9.4%만 프로선수 지명
매년 좁아지는 프로 관문…"지명돼도 또 생존 고민"

[※ 편집자 주 =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열기가 한창인 지금, 그 이면에는 프로 무대에 서기 위해 땀 흘리는 수천 명의 꿈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매년 프로 문턱에서 좌절하는 학생선수가 1천 명에 달하는 게 현실입니다.

이들이 '제2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학습권 보장에 대한 요구가 커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연합뉴스는 학생선수와 그 가족, 교육·체육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이런 실태를 짚고, 개선점을 모색하는 기사 4편을 제작, 순차적으로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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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처음 실패를 맛봤지만 포기한 건 아니에요.

야구는 평생 제 꿈이니까요.

"
지난 9월 15일 이 모(18) 군은 텔레비전 앞에서 한동안 아쉬움을 삼켜야만 했다.

이날은 KBO(한국야구위원회)가 고등학교와 대학교 졸업 예정자 등을 대상으로 주최한 '2023 KBO 신인 드래프트'가 있던 날이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야구부 3학년인 이 군도 드래프트 대상자였지만 두 시간 동안 진행된 행사에서 끝내 그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지난달 초 이 군이 다니는 학교에서 그를 만났다.

이 군은 "후반기 리그에서 성적이 좀 떨어져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면서도 "맘을 비웠는데도 막상 결과를 보고 나니 솔직히 기분이 썩 좋진 않더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본격적으로 글러브를 끼기 시작한 그에게 야구는 10대 시절의 전부였다고 했다.

프로야구선수라는 목표 하나만 보고 이제까지 달려왔지만 10대의 마지막에는 쓴맛을 봐야 했다.

"생각해보니 야구는 늘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좋아했어요.

실패는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대학 진학 등 다른 길을 찾아봐야죠. 야구라는 꿈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
KBO에 따르면 이 군처럼 이번 신인 드래프트에 출사표를 던진 이는 고교 졸업 예정자 793명, 대학교 졸업 예정자 359명 등 총 1천165명이다.

이 중 9.4%인 110명만이 프로구단에 지명을 받았다.

◇ 10명 중 1명만 통과 '바늘구멍'…"10대 시절 '올인'한 꿈인데"
남인환 서울 중앙고 야구부 감독도 요즘 입맛이 쓰다.

중앙고 3학년 학생 선수 12명 가운데 이번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찬 바람 부는 시기죠. 날씨도, 아이들 마음에도…"라고 했다.

프로야구가 포스트시즌 열기로 한창 뜨거울 때, 고교야구는 1년 중 가장 추운 시기를 보내는 셈이다.

남 감독은 "'아, 이제 뭘 하지'라며 풀이 죽은 아이들이 많이 보인다"며 "지금은 훈련보다 자신감을 불어넣는 게 먼저"라고 했다.

어깨가 처진 학생들에게 남 감독은 "이제 원아웃일 뿐"이라고 다독인다고 한다.

아직 공격할 수 있는 아웃 카운트가 두 개나 남았으니 얼마든지 만회할 기회는 있다는 의미다.

그는 아이들이 체감하는 상실감은 어른들의 생각보다 크다고 강조한다.

여러 가능성을 열어둔 채 대학을 거치면서 천천히 진로를 설정하는 일반 학생과는 달리, 이들은 '프로야구선수'라는 하나의 꿈을 보고 10대의 대부분을 전력투구했기 때문이다.

남 감독은 "갈수록 드래프트 신청자가 늘지만 뽑히는 선수는 그대로라 경쟁률이 높아지는 게 걱정"이라며 "예전처럼 야구에만 '올인'하라고 할 수 없는 이유"라고 말했다.

KBO의 신인 드래프트 지원 인원을 보면 프로 입단을 지망한 학생선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

2012년 당시 고교 졸업 예정자 433명, 대학 졸업 예정자 237명 등 총 675명이었던 KBO 드래프트 참가자는 2013년 720명, 2014년 789명, 2015년 884명, 2016년 938명, 2017년 964명으로 매년 증가했다.

2018년에는 처음으로 1천 명을 넘어섰고, 올해에는 역대 최다 인원인 1천165명을 기록했다.

KBO 관계자는 "2012년부터 초·중·고 야구부 창단 지원사업을 꾸준히 이어온 결과"라며 "동시에 4년제(3년제 포함) 대학교 2학년 선수도 참가할 수 있는 '얼리 드래프트 제도'가 올해 처음 시행되면서 지원자가 늘었다"고 설명했다.

올해 얼리 드래프트로 지원한 선수는 59명이다.

반면 프로구단에 지명된 인원은 2013년 117명에서 2014년 115명으로 소폭 감소한 이후로 매년 110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신인드래프트를 통한 취업률은 2013년 16.3%를 시작으로 2014년 14.6%, 2015년 12.4%, 2016년 11.7%, 2017년 11.4%, 2018년 10.3%, 2019년 10.2% 등 매년 하락세를 나타냈다.

역대 최저치인 9.4%를 기록한 올해에는 총 1천55명이 지명을 받지 못했다.

매년 1천 명 내외의 야구 꿈나무들은 프로의 선택을 받지 못해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지난해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지 못한 서울 소재 고교 야구부 출신인 A(20) 씨는 "주변에서 '넌 프로구단 갈 거야'라고 얘기를 많이 해줘서 기대감도 컸었는데, 평생 애정을 쏟은 야구에 외면당했을 때 느낀 상실감은 10대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말했다.

◇ 프로 지명의 기쁨도 잠깐…이어지는 치열한 경쟁
꿈에 그리던 프로야구선수가 됐다는 기쁨도 잠시, 이들은 다른 사회 분야에서도 그렇듯 더 통과하기 힘든 바늘구멍 앞에 선다.

서울 소재 유명 고교 야구부 소속인 B 씨의 아들은 이번 프로야구 드래프트에서 상위 라운드에서 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B씨는 "냉정하게 얘기하면 아들이 프로에서 크게 성공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한다"고 털어놨다.

그는 "1군 무대를 밟고 여기서 주전으로 자리 잡는 선수는 1% 미만 아니냐"라며 "체구가 작고 운동 신경이 뛰어난 편은 아닌 아들이 이 험한 경쟁을 이겨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그는 "아들이 앞으로 다치지 않고 후회 없이 운동하길 바랄 뿐"이라고 했다.

실제로 이번 정규시즌이 마감된 지난 10월 8일 전후로 프로야구 구단들은 앞다투어 팀마다 10명 전후의 방출 명단을 발표했다.

2007년 광주 진흥고를 졸업한 설재훈(34) 씨도 우여곡절 끝에 28살이던 2015년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 2군에 육성선수로 입단하면서 꿈에 그리던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고교 3학년 시절 프로지명을 받지 못해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친 뒤 한국과 일본 독립리그를 거치면서도 꿈을 놓지 않았던 결과였다.

그러나 결국 1군 무대를 밟지 못하고 은퇴해야만 했다.

현재 경기도 수원에 있는 한 은행에서 대출 심사 업무를 담당하는 설 씨는 "나에게 야구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존재였는데, 당시 방출 소식을 들었을 때 '진짜 여기까지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진짜 남김없이 노력했기에 후회는 없다"며 "이번에 프로에 가지 못해서 낙심한 후배가 있다면 '인생 전체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라고 조언해주고 싶다"고 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에 따르면 대한체육회가 2019년 은퇴 선수 8천251명을 대상으로 생활실태를 조사한 결과 41.9%가 무직 상태라고 응답했다.

취업자 중에서도 28.2%는 자영업·사무직처럼 경력과 무관한 분야에서 일하고 있었다.

교수·교사·강사, 심판 등 운동 관련 직업 비율은 29.8%였다.

은퇴선수(선수 경력 3년 이상· 은퇴 나이 20세 이상 39세 이하)들의 평균 은퇴 연령은 23세로 나타났다.

김 의원은 "한창 경제활동을 할 나이에 은퇴하는 운동선수들이 다시 사회의 일원으로 '제2의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며 "다양한 직무 교육체계 구축과 함께 이들이 특기를 살려 생활체육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연계 사업을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민규 한국야구학회 이사는 "프로구단으로부터 외면받은 학생들이 운동장이 아닌 다른 곳에 안착하려면 결국 '학업 병행'은 필수"라며 "매년 프로 문턱에서 좌절하는 1천여 명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공부의 역할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글 싣는 순서]
①매년 야구 꿈나무 1천명이 '꿈' 접는다
②"운동만도 벅차" vs "공부는 학생 본분"
③그들이 '제2의 꿈' 찾을 수 있게 하려면
④좌절 딛고 일어선 힘도 "학교서 배웠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