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개 낀 바다, 화면에 '海'와 '바다'가 동시에 필기체로 적힌다.
"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은 부산과 이포에서 각각 발생한 변사사건을 중심으로 가운데가 접히는 구조다.
서래(탕웨이 분)와 해준(박해일)은 산꼭대기에서 발생한 추락사를 계기로 만나고 파도치는 바닷가에서 이별한다.
최근 출간된 '헤어질 결심 각본'(박찬욱 정서경 지음)을 보면 이 같은 대비가 더욱 선명하게 읽힌다.
애초 각본에는 산과 바다를 화면에 한글과 한자로 적는 방식으로 영화의 두 파트를 더 선명하게 구분하는 것으로 돼 있다.
영화와 달리 두 파트의 첫 장면 역시 산과 바다였다.
각본은 두 부분을 서래의 첫 남편 기도수(우승목)가 숨진 산에서, 이포경찰서로 옮긴 해준이 고깃배를 띄우고 낚시를 하는 바다에서 각각 시작한다.
이런 대비는 산을 좋아하는 기도수와 바다를 좋아하는 서래의 갈등 배경으로도 작용한다.
각본은 서래의 '산해경'(山海經)을 좀 더 비중 있게 그린다.
산해경은 원래 고대 중국의 지리서지만, 영화에서는 서래가 외할아버지에게 필사본을 물려받아 이야기를 지어내고 한국어 교재로도 쓰는 책으로 나온다.
각본집 표지로 쓰인 산해경 속 깨알처럼 작은 한글은 탕웨이가 직접 썼다.
각본의 해설과 지시문에는 영화에서 쉽게 알아채지 못하는 디테일이 담겼다.
서래가 TV로 보는 영화 속 드라마의 제목은 '흰 꽃'과 '적색비상'이다.
두 드라마는 대사를 통해 각각 전반부와 후반부 서래의 심경이나 처지를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적색비상'은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수습한다는 내용의 한류 드라마다.
서래가 몰려드는 중국인 관광객 가이드를 위해 해준이 근무하는 이포로 이사하는 명분을 제공한다.
해준이 서래를 초대해 새우볶음밥을 만들어주는 장면에서 해준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책들은 스웨덴 작가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다.
박찬욱 감독은 이 소설 주인공인 형사 마르틴 베크에서 해준 캐릭터의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영화에서 생략된 두 번째 남편 임호신(박용우)과 서래의 만남 계기도 각본으로 알 수 있다.
서래가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화요일마다 돌보던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임호신이 상주 완장을 차고 서래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장면이다.
수영장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임호신이 손목에 찬 롤렉스 시계는 첫 남편 기도수의 시계와 같은 것이다.
서래는 기도수가 추락사한 뒤 그의 시계를 깨진 유리만 바꿔 임호신에게 선물한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