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A 11회 우승' 빌 러셀 타계…"챔피언이자 사회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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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임벌린과 라이벌 구도로 NBA 흥행 견인…선수·감독으로 '명예의 전당'
흑인 민권운동에도 적극 참여…2011년 대통령 자유훈장 받아 미국프로농구(NBA) 최다 우승 기록 보유자인 빌 러셀이 향년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러셀의 유족들은 1일(한국시간) SNS를 통해 러셀의 타계 소식을 전했다.
유족은 사인을 밝히지 않았으나, 러셀은 지병을 앓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러셀은 NBA를 대표하는 레전드로 꼽힌다.
1990년대 마이클 조던의 시대가 열리기 전 많은 팬이 역대 최고의 NBA 스타로 러셀을 꼽았다.
러셀은 195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2순위로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에 지명됐고, 곧바로 보스턴 셀틱스로 이적했다.
보스턴 한 팀에서만 뛴 러셀은 1958-1959시즌부터 8회 연속 파이널에서 우승한 것을 포함해 총 11번(1957, 1959~1966, 1968, 1969)이나 챔피언 반지를 꼈다.
이는 한 선수의 최다 파이널 우승 기록으로 남아있다.
러셀은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에 5차례(1958, 1961~1963, 1965) 올랐고, 올스타에 12차례(1958~1969)나 선정됐다.
NBA는 2009년부터 파이널 MVP 트로피 이름을 '빌 러셀 트로피'로 부르고 있다.
러셀과 1999년 타계한 윌트 체임벌린의 라이벌 구도는 NBA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러셀(208㎝)은 체임벌린(216㎝)보다 키가 작았지만 특출난 수비 능력을 앞세워 맞대결에서 박빙의 승부를 벌이곤 했다.
개인 수상 기록에서는 체임벌린이 러셀을 앞서지만, 최다 우승 횟수에서만큼은 러셀이 체임벌린(2회)을 압도했다.
러셀은 감독으로도 큰 족적을 남겼다.
보스턴(1966~1969)과 시애틀 슈퍼소닉스(1973~1977), 새크라멘토 킹스(1987?1988)를 지휘했는데, 보스턴에서 두 차례 파이널 우승(1968, 1969)을 일궜다.
러셀은 이 두 번의 우승 당시 감독 겸 선수 신분이었다.
선수로는 완전히 은퇴하고 지휘봉을 잡은 시애틀에서는 두 차례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뤘다.
러셀은 농구 명예의 전당에 선수(1975)와 감독(2021)으로 모두 헌액됐다.
인종차별이 극심할 때 현역으로 뛰었고,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프로구단 사령탑에 오른 러셀은 흑인 민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나에겐 꿈이 있다'라는 명연설을 한 1963년 '직업과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에 러셀도 함께했다.
러셀은 복싱 레전드 무함마드 알리가 병역거부로 비난받을 때 지지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2011년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자유훈장을 받았다.
보스턴 구단은 성명을 내고 "한 스포츠의 위대한 챔피언이 되고, 그 종목의 경기 방식에 혁명을 일으키며, 그와 동시에 사회 지도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러셀은 그렇게 했다"고 평가했다.
애덤 실버 NBA 커미셔너는 "러셀은 스포츠보다 훨씬 큰 '평등·존중·포용'이라는 가치를 지지했고, 이를 NBA의 DNA로 각인했다"고 성명을 통해 강조했다.
러셀의 유족은 그가 아내 곁에서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연합뉴스
흑인 민권운동에도 적극 참여…2011년 대통령 자유훈장 받아 미국프로농구(NBA) 최다 우승 기록 보유자인 빌 러셀이 향년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러셀의 유족들은 1일(한국시간) SNS를 통해 러셀의 타계 소식을 전했다.
유족은 사인을 밝히지 않았으나, 러셀은 지병을 앓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러셀은 NBA를 대표하는 레전드로 꼽힌다.
1990년대 마이클 조던의 시대가 열리기 전 많은 팬이 역대 최고의 NBA 스타로 러셀을 꼽았다.
러셀은 195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2순위로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에 지명됐고, 곧바로 보스턴 셀틱스로 이적했다.
보스턴 한 팀에서만 뛴 러셀은 1958-1959시즌부터 8회 연속 파이널에서 우승한 것을 포함해 총 11번(1957, 1959~1966, 1968, 1969)이나 챔피언 반지를 꼈다.
이는 한 선수의 최다 파이널 우승 기록으로 남아있다.
러셀은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에 5차례(1958, 1961~1963, 1965) 올랐고, 올스타에 12차례(1958~1969)나 선정됐다.
NBA는 2009년부터 파이널 MVP 트로피 이름을 '빌 러셀 트로피'로 부르고 있다.
러셀과 1999년 타계한 윌트 체임벌린의 라이벌 구도는 NBA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러셀(208㎝)은 체임벌린(216㎝)보다 키가 작았지만 특출난 수비 능력을 앞세워 맞대결에서 박빙의 승부를 벌이곤 했다.
개인 수상 기록에서는 체임벌린이 러셀을 앞서지만, 최다 우승 횟수에서만큼은 러셀이 체임벌린(2회)을 압도했다.
러셀은 감독으로도 큰 족적을 남겼다.
보스턴(1966~1969)과 시애틀 슈퍼소닉스(1973~1977), 새크라멘토 킹스(1987?1988)를 지휘했는데, 보스턴에서 두 차례 파이널 우승(1968, 1969)을 일궜다.
러셀은 이 두 번의 우승 당시 감독 겸 선수 신분이었다.
선수로는 완전히 은퇴하고 지휘봉을 잡은 시애틀에서는 두 차례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뤘다.
러셀은 농구 명예의 전당에 선수(1975)와 감독(2021)으로 모두 헌액됐다.
인종차별이 극심할 때 현역으로 뛰었고,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프로구단 사령탑에 오른 러셀은 흑인 민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나에겐 꿈이 있다'라는 명연설을 한 1963년 '직업과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에 러셀도 함께했다.
러셀은 복싱 레전드 무함마드 알리가 병역거부로 비난받을 때 지지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2011년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자유훈장을 받았다.
보스턴 구단은 성명을 내고 "한 스포츠의 위대한 챔피언이 되고, 그 종목의 경기 방식에 혁명을 일으키며, 그와 동시에 사회 지도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러셀은 그렇게 했다"고 평가했다.
애덤 실버 NBA 커미셔너는 "러셀은 스포츠보다 훨씬 큰 '평등·존중·포용'이라는 가치를 지지했고, 이를 NBA의 DNA로 각인했다"고 성명을 통해 강조했다.
러셀의 유족은 그가 아내 곁에서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