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지가 9일 서울 서초동 ‘스튜디오 파랑’에서 자신의 별명인 ‘덤보’를 그리고 있다.  김병언 기자
전인지가 9일 서울 서초동 ‘스튜디오 파랑’에서 자신의 별명인 ‘덤보’를 그리고 있다. 김병언 기자
전인지(29)와 마주한 곳은 타구음으로 가득한 골프연습장이 아니라 조용한 미술 작업실이었다. 굳은살이 가득한 그의 손에 들린 것도 골프채가 아니라 붓이었다.

지난달 27일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메이저대회인 ‘KPMG 여자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메이저 퀸’을 지난 9일 화가 박선미(60)의 작업실인 서울 서초동 ‘스튜디오 파랑’에서 만났다. 전인지는 “새벽 5시에 눈을 떴는데 그림에 대한 영감이 떠올라 곧바로 작업실로 향했다”며 “그림은 저에게 골프에 대한 열정을 살려준 소중한 친구다. 그림에서 얻은 힘으로 커리어 그랜드슬램까지 달려가겠다”고 말했다.

3년8개월 만에 날아오른 ‘덤보’

전인지는 박세리-신지애-박인비에 이어 한국 엘리트 여성 골퍼의 ‘적통’을 잇는 기대주였다. 2012년 등장과 함께 국내 프로무대를 평정한 뒤 2016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LPGA투어 신인왕과 최저타수상을 휩쓸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US여자오픈, 에비앙챔피언십 등 메이저대회를 거머쥐며 대형 스타 자리를 예약했다. 2018년 10월 KEB하나은행 챔피언십에서 우승할 때까지 그랬다.

이후 긴 슬럼프가 시작됐다. 우승은커녕 리더보드 상단에서도 그의 이름은 사라졌다. 그럴 때마다 “골프가 아니라 다른 데 빠진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은 커졌다. 평소보다 더 연습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마음먹은 대로 되던 골프가 뭘 해도 듣지 않으니, 그가 받는 상처는 점점 커졌다. 전인지는 “은퇴도 생각했지만 ‘평생 해온 운동을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란 마음으로 버텼다”고 했다.

그렇게 3년8개월을 보냈다. 전인지는 “KPMG 여자 PGA 챔피언십 대회 직전과 직후에 두 번 펑펑 울었다”며 “대회 전에는 ‘이렇게 칠 거면 은퇴하자’고 쓴소리를 날린 스승 박원 코치에 대한 서운함에 울었고, 대회 직후에는 저의 부활을 기다려준 팬과 후원사에 대한 고마움에 울었다”고 했다. 박 코치는 직전 두 대회에서 전인지가 공동 72위와 공동 67위에 머무르자 “샷에 혼이 실리지 않았다”며 은퇴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대회 첫날, 전인지는 버디 9개와 보기 1개로 8언더파를 몰아쳤다. 2위 최혜진(23)과는 5타 차였다. 선수들 사이에서 “전인지 혼자 쉬운 코스에서 친 것 같다”는 반응이 나왔다. “주변을 잊고 자신의 경기에만 몰입하는 ‘존(zone)에 빠져 있는’ 상태였어요. 치면 붙고, 굴리면 들어가더라고요. 다른 선수들도 버디를 많이 했겠다고 생각했는데, 끝난 뒤 압도적인 1위란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죠.”

2라운드까지 6타 차 단독 선두로 질주하자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3라운드 티잉 에이리어에 들어설 때까지 ‘큰일 났네. 이렇게 차이가 많이 나는데 우승하지 못하면 망신인데…’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부담 덜어내니 퍼팅라인 보여”

3타 차 선두로 최종 라운드를 앞둔 밤, 새벽 1시에 눈이 떠졌다. 부담감 때문이었다. 계속 뒤척이다가 나선 최종 라운드. 피곤함 때문인지, 답답한 흐름이 이어졌다. 퍼트가 홀을 살짝 비껴나가며 타수를 까먹은 사이 렉시 톰슨(27·미국)에게 선두를 내줬다. 15번홀에서 2타 차까지 벌어졌다. 압박감에 스스로 무너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역전의 발판은 16번홀(파5)에서 찾아왔다. 세 번 만에 공을 그린에 올린 전인지는 그린을 읽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전인지는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는 모습을 지켜본 캐디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인지, 하던 대로 하면 돼.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고 보이는 대로 치자.’ 그 말에 콩닥콩닥 뛰던 가슴이 조금 진정됐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을 캐디도 알았던 모양이다. 평정심을 되찾은 전인지는 버디를 잡았지만 마음이 흔들린 톰슨은 보기를 기록하며 동타가 됐다.

17번홀(파4)에선 전인지가 파를 쳤지만 톰슨이 보기를 범했다. 1타 차 선두로 나선 마지막 홀. 톰슨의 5m 버디 퍼트가 홀을 벗어났다. 이제 전인지 차례. “퍼트하려고 셋업하는데 오른다리가 덜덜 떨리더라고요. ‘평소대로 하자’고 마음을 다잡아도 몸이 말을 안 듣더군요. 겨우 파 퍼트를 성공시키니 ‘이제 끝났다’는 생각에 눈물이 터져나왔습니다.”

메이저 3승을 달성한 전인지는 AIG 여자오픈이나 셰브런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추가하면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이루게 된다. 한국 선수로는 박인비(34)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기록이다.

“커리어 그랜드슬램, 정말 하고 싶죠. 그러려면 지난 대회 16번홀 버디 퍼트 순간처럼 경기해야 할 것 같아요. 평소에 열심히 연습하고, 실전에선 평소에 연습하던 대로 하는 겁니다. 우승에 목을 매는, 그래서 다른 모든 걸 포기하는 삶은 더 이상 아닌 것 같아요. 그림도 그리고, 친구도 만나고, 훈련도 하는 오늘이 저에겐 우승한 날만큼 소중한 하루거든요.”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