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칸딘스키의 뮤즈'가 아닌 화가로 이름 남긴 뮌터
“여성은 선천적으로 아마추어기 때문에 생산적인 미술가가 될 수 없다.” 독일의 유명한 미술평론가 카를 셰플러는 1908년 펴낸 《여성과 미술》에 이렇게 썼다. 여성들이 세계 미술계를 주름잡는 요즘 현실에서 보면 코웃음이 나는 망언이지만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이런 주장은 정설로 통했다. 아무리 재능이 출중한 여성이라도 작가로 활동하는 건 쉽지 않았다. 허락된 자리는 남성 화가에게 영감을 제공하는 ‘뮤즈’ 혹은 ‘화가의 현모양처’가 고작이었다.

독일 여성 화가 가브리엘레 뮌터(1877~1962)는 예외에 속한다. 그는 추상미술 거장 바실리 칸딘스키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다. 당시 이만한 ‘거물’을 연인으로 둔 여성 화가들은 작품 활동을 그만두고 내조에 집중하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뮌터는 계속 작품 활동을 하며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독일 미술사학자이자 작가인 보리스 폰 브라우히취가 지은 《가브리엘레 뮌터》는 뮌터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은 뮌터가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삶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남성 화가들은 뮌터를 무시하면서도 경계했다. 뮌터에게 칸딘스키에 기생하는 ‘좀나방’이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뮌터는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에 대한 편견을 역이용했다. 당시 남성 화가들은 한 가지 형식과 화풍에 천착하는 게 보통이었다. 반면 뮌터는 초상화와 꽃그림부터 동판화와 사진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뮌터는 팔색조처럼 다양한 매력을 뽐내는 화가로 미술사에 남았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