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인아츠 제공
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인아츠 제공
흰색 바탕에 회색 톤 꽃문양이 아로새겨진 드레스를 입은 힐러리 한(43)이 무대에 등장합니다.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OSM)의 음악감독 라파엘 파야레(42)가 뒤따라 들어옵니다. 6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OSM의 내한공연 두 번째 무대 현장입니다.

전날(5일)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에서 열린 OSM 내한공연 기자회견에서 힐러리 한의 발언 중 두 가지가 제 관심을 끌었습니다. 하나는 “얼음공주란 별명을 아느냐”는 다소 짓궂은 질문에 “이제 공주가 여왕이 될 때가 됐다”고 재치 있게 답변한 것입니다. 옆에서 듣던 파야레는 손뼉까지 치면서 동조(?)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10세에 미국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해 16세에 대학 과정을 마치고, 17세에 낸 바흐 무반주 소나타&파르티타 데뷔 앨범으로 권위 있는 음반상인 ‘디아파종’ 상을 받은 ‘천재소녀’가 이제 40대가 됐습니다. 그 사이 20여 종의 음반을 발매하고 그래미상을 세 번이나 받은 세계 최정상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성장했습니다. 재닌 얀센, 율리아 피셔와 함께 ‘21세기 현의 여제’로 불리는 판인데요. 물론 ‘얼음공주’는 완벽주의를 지향하며 냉철하고 이지적인 연주를 하는 스타일 때문에 붙은 별명이고, 힐러리 한도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2018년 12월 이후 3년 6개월 만에 열리는 내한 무대에서 어떤 ‘여왕’의 풍모를 보여줄지 기대가 됐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날 협연곡인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이 “파리에서 초연된 곡이고 (음악에서) 프랑스 느낌이 많이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지난해 발매한 앨범 ’파리(Paris)‘에도 수록했나 봅니다. 이전에 여러 번 들어봤고 곡 해설도 두루 읽어봤지만 “전형적인 프랑스 느낌도 난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습니다. ‘이 곡이 그랬나’ 싶었습니다. 개별 인터뷰였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물어봤을 텐데 그럴 여건이 안 돼 힐러리 한의 실연(實演)에서 확인해볼 참이었습니다.
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인아츠 제공
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인아츠 제공
연주가 시작됐습니다. 들릴락 말락 하는 비올라의 트레몰로에 독주 바이올린의 서정적인 1주제 선율이 얹힙니다. 작곡가는 악보에 ‘꿈꾸듯이(Sognando)’라고 적었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정통 슬라브의 서정성보다는 몽환적인 프랑스풍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힐러리 한은 특유의 침착함과 치열함으로 연주를 이어 나갑니다. 결이 다른 기괴한 제2주제에 이어 관악과 독주 바이올린이 다채로운 발전과 변주를 펼칩니다. 비올라의 트레몰로가 다시 나오고 플루트의 미끄러지는 듯한 멋진 마무리로 1악장이 끝나는데 이 대목에서도 살짝 드뷔시 느낌이 났습니다. ‘프랑스’가 제 머릿속에 들어 있어서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겠습니다.

2악장 스케르초 비바치치모는 여지없는 ‘청년 프로코피예프’풍입니다. 피아노를 타악처럼 다룬 작곡가의 스타일이 만연합니다. 힐러리 한은 고난도의 현란한 기교를 참으로 편하게 구사하면서 다양한 주법이 내는 바이올린의 음색을 또렷하게 구별해 들려줍니다. 바이올린의 다채로운 음색을 만끽했습니다. 작곡가의 젊은 혈기를 ‘40대 여왕’이 능수능란하게 요리했다고 할까요.

다시 서정적인 3악장입니다. 독주와 오케스트라가 일치된 호흡으로 환상적인 변주를 이어갑니다. 2018년 12월 파보 예르비와의 롯데콘서트홀 공연 이후 3년 6개월 만에 본 힐러리 한은 좀 더 여유로워졌습니다. 빈틈 없고 오차 없는 연주는 ‘얼음공주’ 그대로지만 표정은 풍부해졌습니다. 잠시 독주가 쉬는 타임에 바이올린 연주자들에게 미소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봤던 실연과 연주 영상 중에서 이런 모습은 처음입니다.

파야레의 조율도 훌륭했습니다. 솔리스트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긴 팔을 역동적으로 휘두르며 멋진 앙상블을 이뤄냈습니다. 독주와 오케스트라 간 톤과 밸런스가 딱 맞게 어우러져 듣기 좋은 소리를 만들어냈습니다. 힐러리 한이 전날 “OSM만의 개성과 제가 가지고 있는 개성이 어우러져 우리만의 느낌으로 전 세계에 하나뿐인 음악적 경험을 선사하겠다”고 한 얘기대로 유일무이하고 특별한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경험했습니다.

앙코르가 시작됐습니다. 첫 곡은 바흐의 무반주 파르티타 2번 중 ‘사라방드’입니다. 힐러리 한의 17세 데뷔 앨범에 수록된 곡이자 단골 앙코르곡입니다. 느릿하게 흐르는 서정적인 선율이 앞서 본 공연에서 들려준 프로코피예프의 서정성과 기막히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주회장에서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지금 흐르는 음악이 끊이지 않고 끝없이 오래오래 계속됐으면 좋겠다 싶은. 힐러리 한이 연주하는 ‘사라방드’가 그랬습니다.

이어 파르티타 3번의 끝 곡인 ‘지그’를 연주합니다. 직전 내한 협연 무대에서도 앙코르로 들려줬던 곡입니다. 힐러리 한은 보통 앙코르로 두 곡정도 하기 때문에 이제 1부가 마무리되겠구나 싶었는데요. 끊이지 않는 환호와 박수에 코로나 팬데믹 이후 아시아에서 열린 첫 무대를 이대로 끝내기 싫었나 봅니다. 활짝 웃으며 손가락과 표정으로 ’원 모어‘를 그리더니 곧바로 세 번째 앙코르곡을 연주합니다. 이것도 달라진 모습입니다.
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인아츠 제공
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인아츠 제공
곡은 파르티타 3번 세 번째 곡 ’가보트& 론도‘. 한 달여 전에 열린 빈 심포니 내한 공연에서 길 샤함도 앙코르에서 빠짐없이 들려줬던 곡입니다. 두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 스타일이 확연히 달랐습니다. 길 샤함이 굉장한 속주로 자유분방하게 템포를 변주하며 연주했다면, 힐러리 한은 표준적인 교과서 스타일 연주입니다. 템포를 엄격하게 지키며 악보에 있는 한 음표, 한 음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들려줬습니다. 그럼에도 참 듣기 좋았습니다. 연륜이 녹아들었다고 할까요. 중후한 기품이 흐르는 아름다운 연주였습니다.

OSM의 내한 공연은 7일 대구콘서트하우스에 이어 8일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마무리됩니다. 힐러리 한은 ‘친한파‘인데다가 유럽과 북미 명문 오케스트라의 아시아 투어 때 자주 초청받은 연주자이고, 워낙 꾸준히 성실하게 연주활동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 다시 한국 무대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는 또 어떤 곡을 들고,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