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겪는 여자와 공포 유발하는 남자들
분노와 공포의 끊임없는 재생산…부천국제영화제 개막작 '멘'
하퍼(제시 버클리 분)는 친구가 구해준 시골마을의 오래된 집에 짐을 푼다.

남편의 죽음이 가져온 심리적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관리인 제프리(로리 키니어)는 친절한 듯하지만 왠지 모르게 음산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가 호의로 건네는 말들은 곱씹어 보면 불쾌한 구석이 있다.

앞니를 드러내며 짓는 미소 역시 마찬가지다.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 개막작 '멘'(Men)은 전형적 하우스 호러처럼 시작한다.

그러나 놀라게 하는 효과 대신 음습하고 기괴한 분위기로 관객을 천천히 끌어내린다.

분노와 공포의 끊임없는 재생산…부천국제영화제 개막작 '멘'
영화는 하퍼의 트라우마로 시작한다.

이혼을 요구하는 하퍼에게 남편 제임스(파파 에시두)는 자살 협박으로 맞섰다.

손찌검까지 한 남편은 위층으로 올라갔다가 추락했다.

하퍼는 허공에서 발버둥치며 죽음을 향해 가는 남편과 눈을 마주쳤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경험이다.

거처를 잠시 옮긴다고 해서 끔찍한 기억이 사라질 리 없다.

숙소 인근 숲 속에서 산책을 하면서도, 교회에 가서도 분노와 죄책감이 뒤섞인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인간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는 녹색 생명체가 숲에서 숙소까지 하퍼를 뒤따라오면서 공포심이 추가된다.

분노와 공포의 끊임없는 재생산…부천국제영화제 개막작 '멘'
하퍼가 숙소 주변을 배회하는 '그린맨'을 경찰에 신고하면서 그를 둘러싼 의문은 간단히 풀리는 듯했다.

경찰은 그린맨을 노숙자로 판단한다.

그러나 주변 남자들 탓에 하퍼의 공포는 더욱 커져간다.

경찰은 그린맨이 제시를 해칠 의도가 없었다며 금세 풀어준다.

교회 목사는 남편의 죽음으로 괴로움을 호소하는 제시를 위로하기는커녕 책임을 추궁한다.

숨바꼭질을 하자며 대뜸 욕설을 하는 소년, 하퍼의 악몽을 애써 모른 척하는 바텐더까지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적대적이고 불쾌한 기운을 풍긴다.

분노와 공포의 끊임없는 재생산…부천국제영화제 개막작 '멘'
인간 또는 남성의 쉼 없는 재생산을 형상화한 후반부 10분은 기괴하고 충격적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날 때 경험한 출생 과정이지만, 적나라하고 느릿한 묘사에 몸서리칠 관객이 많을 듯하다.

장르를 굳이 따지자면 보디 호러다.

그러나 영화는 곳곳에 배치한 종교·신화적 상징과 이미지, 번갈아 나타나 분노와 공포를 유발하는 인물들을 통해 인간의 원시적 조건을 파고든다.

그린맨은 유럽에서 자연에 대한 동경 또는 남성의 힘을 의미하는 상징물이다.

추락한 남편 제임스는 왼손을 쇠창살에 관통당한 채 예수처럼 고개를 떨군다.

하퍼는 시골마을에 도착해 사과를 따먹는다.

분노와 공포의 끊임없는 재생산…부천국제영화제 개막작 '멘'
알렉스 갈런드 감독은 SF 스릴러 '엑스 마키나'(2015)에서 연구소에 갇힌 인공지능 로봇을 통해 인간의 조건을 탐구했다.

이번엔 무대를 영국 시골로 되돌렸지만, 인간과 제도의 본질에 질문을 던지는 태도는 여전하다.

제시 버클리는 극단적이고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이면서도 공포에 굴하지 않는 여성을 완벽하게 연기한다.

로리 키니어는 그린맨을 포함해 1인 9역을 소화한다.

7일 밤 부천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영화는 오는 13일 정식 개봉한다.

100분. 청소년 관람불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