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김경숙 디렉터는 남들이 은퇴와 그 이후를 고민할 나이에 모국어도 아닌 영어로 전 세계 미디어를 상대로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구글을 홍보하는 인터내셔널 미디어·스토리텔링 담당 디렉터로 자리를 옮겼다.
영어가 달변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실상 없던 자리를 스스로 만든 뒤 그 자리로 옮겨갔다.
그는 구글코리아에서 일하던 2019년 6월 구글의 전 세계 커뮤니케이션 담당자가 1년에 한 번 모이는 연례행사에서 부사장에게 '미국이 아닌 해외 특파원들을 담당하는 역할을 신설하자'고 제안했다.
그러곤 휴가를 떠났는데 휴가지에서 받아본 본사 부사장의 이메일에는 올해 행사 정리와 함께 새 일자리에 대한 채용 공고가 담겨 있었다.
정김 디렉터가 제안한 바로 그 직책이었다.
"내 제안이 중요하다는 걸 인정받았다는 것만 해도 기뻤어요.
공고가 난 자리는 내 직급(디렉터)보다 낮은 자리였지만 내가 '관심이 있다'고 했더니 직급을 더 올려 나를 뽑아줬습니다"
12년간 구글코리아에 몸담아온 그였지만 나이 쉰에 졸지에 가족과 헤어져 실리콘밸리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물론 전혀 준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마흔 살 때부터 하루 3∼4시간씩 영어 공부를 해왔고, 이 자리를 제안할 만큼 역할과 비전에 대한 고민도 깊었다.
그래도 두려움은 많았다고 한다.
"구글코리아에선 정김경숙 전무라고 하면 다 알아줬어요.
하지만 미국에선 바닥부터 시작이니까 내가 쌓은 걸 다 두고와야 했죠. 커뮤니케이션 담당은 원어민에게도 힘들다는데 영어가 모국어도 아니었으니까요.
구글코리아에서 쌓은 이력을 다 망치고 망해서 줄행랑을 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워커홀릭(일 중독자)이라 할 정도로 업무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정김 디렉터는 이런 우려를 모두 떨쳐내고 3년째 구글 본사에서 순항하고 있는 듯 했다.
출발 당시 '1인팀'이었던 팀은 미국에 와 있는 해외 특파원 외에 뉴미디어(팟캐스트)와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까지 업무 영역이 넓어지면서 3명으로 커졌다.
그는 "내가 느낀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이를 많이 알리라는 것"이라며 "어떤 일이든 준비가 안 됐다고 도전하지 않으면 영원히 기회는 오지 않는다.
준비가 안 됐다고 느껴도 일단 시작하면 자신감은 따라온다"고 조언했다.
정김 디렉터는 또 '체력이 곧 실력'이란 믿음의 신봉자다.
실제 마라톤, 인라인 스케이트, 스노보드 등을 섭렵했고, 검도는 14년째 하고 있다.
실리콘밸리로 온 뒤엔 평생 공포의 대상이었던 '물'을 극복하기 위해 수영에 도전했고 결국 정복했다.
그는 "체력이 뒤따라줘야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기고 그걸 주도해보고 싶어진다.
짜증 나고 힘들면 그런 아이디어도 나오지 않는다.
운동이 필요하다는 건 다 아는데 그럼 어떻게 꾸준히 하느냐. 남들이 잘하지 않는 쿨한 운동을 해보거나 운동과 관련한 대회를 나가보는 것도 좋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사람들 머릿속에는 원체 타고나기를 의욕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으로 태어난 정김 디렉터가 그려질 것이다.
하지만 실상 그는 대학 때까지 '트리플 A급'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고교 때 소풍을 가서는 누군가에게 '같이 밥 먹자'는 말을 붙이지 못해 끼니를 거른 채 싸갔던 김밥을 고스란히 가지고 돌아와야 했다고 한다.
이런 자신이 무척 싫었고 늘 바꾸고 싶었다.
대학 졸업 후 과 커플이었던 남편과 함께 떠난 미국 유학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됐다.
남편과 일부러 헤어져 오지인 네브래스카주로 경영학 석사(MBA) 과정에 입학했고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자신을 만든 것이다.
사람을 만나면 먼저 말을 건네며 인사해보기도 하고 수업 시간에도 나서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정김 디렉터는 "연기하듯이 사람들과 인사하고 발표를 했다"며 "1년을 그렇게 살고 나니 성격이 바뀌어 있더라"고 말했다.
그는 "그때 운동도 시작하면서 운동의 힘도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요컨대 그는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위해 인격 개조까지 한 셈이다.
정김 디렉터는 이렇게 성격 개조까지 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해 "아파해야 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바닥까지 내려가서 '이런 내가 너무 싫다'는 순간이 있었다"며 "거기에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장(場)에, 환경에 던져놓을 필요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어 공부에 매진하게 된 것도 엄청난 실수 때문이었다.
구글코리아에 입사한 지 2∼3년쯤 됐을 때 아시아태평양지역 회의에서 발표를 맡았는데 앞을 볼 용기가 없어서 바닥을 보고 발표를 했다.
그렇게 7분간 발표를 마친 뒤 고개를 들었을 때 사람들이 아무도 자신의 발표를 듣지 않은 채 다른 주제를 토론하고 있었다.
'음소거 해제'를 하지 않은 채 발표했던 탓이다.
정김 디렉터는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며 "그때 영어는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한번 해보겠다고 다짐했고, 그게 사실은 자산이 됐다"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사건은 인생 최대의 실수이자 최고의 실수였던 셈이다.
어떻게 보면 정김 디렉터의 삶은 실수와 실패를 성장과 발전의 도약대로 삼아온 나날의 축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또 오랜 직장 생활을 위해 지속해서 내면을 채우는 '인풋'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남들보다 오래 불타려면 그만큼 '땔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연세대 독문과를 졸업한 그는 이후 네브래스카대학 MBA,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경희대 e비즈니스 석사 과정, 서울대 행정대학원, 서울과학기술대 디지털문화정책대학원 등 다섯 개의 대학원을 거쳤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