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떡·수제비 다양한 음식으로 활용…눈과 입이 즐겁다
새하얀 메밀꽃 물결이 출렁이는 제주. 봄·가을이 되면 제주 곳곳에는 소금을 뿌려놓은 듯, 팝콘이 쏟아진 듯 하얀 꽃송이가 수도 없이 피어나 메밀밭을 가득 채운다.
제주를 찾은 이들은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든, 흐뭇한 달빛 아래서든 숨이 막힐 듯 아름다운 추억을 하나씩 간직하게 된다.
메밀 하면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인 강원도 봉평을 떠올리겠지만 이제 메밀은 봄과 가을 제주 관광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메밀 씨앗을 전해준 제주 농경신 자청비 신화와 함께….
◇ 메밀을 늦게 심는 까닭은?
제주 무속 신화인 세경본풀이에 등장하는 여신 자청비.
자청비는 노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늦둥이 딸이었다.
사랑을 찾아 불구덩이도 마다하지 않는 용기와 온갖 역경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지혜를 갖춘 덕에 자청비는 대지를 관장하는 사랑과 농경의 신이 된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의 특성상 이야기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다.
자청비가 여신이 되는 과정을 담은 제주 농경 신화 '세경본풀이'를 보면 제주 농경의 시작과 제주의 중요한 효자 곡물이 된 메밀의 사연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신화 속에서 자청비는 하늘 옥황(玉皇) 문선왕의 아들 문 도령과 만난 뒤 남장을 하고 글공부를 하러 떠나 문도령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문 도령이 하늘나라로 돌아가면서 이별하게 된다.
이후 문 도령을 찾기 위한 자청비의 모험이 시작된다.
자청비는 자신을 사모하던 남자 노비로부터 겁탈을 당할뻔하기도 하고, 어렵게 정인과 만나 혼례를 하지만 문 도령은 하늘 옥황 선비들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는다.
자청비는 하늘나라 서천꽃밭의 환생꽃과 멸망꽃을 따다가 남편을 살리고, 하늘의 난리를 막는 등 커다란 공을 세우게 된다.
옥황은 자청비에게 하늘에서 같이 살자고 했지만, 그녀는 끝내 거절한다.
자청비는 "하늘님아 부디 상을 내리시겠다면, 제주 땅에 내려가서 심을 오곡의 씨를 내려주시옵소서"라고 간청한다.
자청비는 여러 가지 곡식 종자를 얻어서 땅으로 내려와 농경의 신이 돼 사람들이 풍년 농사를 짓도록 돕는다.
그런데 깜빡 잊고 온 씨앗 하나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부랴부랴 하늘에 다시 올라가 씨앗을 가져오니 그것이 바로 '메밀'이었다.
그래서 메밀 씨를 다른 씨보다 늦게 뿌린다고 한다.
◇ 제주인의 삶과 밀접한 메밀
여신 자청비가 하늘에서 늦게 가져온 덕분일까.
사람들은 메밀을 다른 잡곡보다 늦게 파종하더라도 겨울이 오기 전에 수확할 수 있었다.
제주에서는 비교적 해발이 높은 곳에서 처서(8월 23일경) 무렵에 메밀을 파종, 상강(10월 23일경) 이후에 거둬들였다.
반드시 윤작을 위해 겨울로 접어드는 11월 중순 이전에는 수확을 끝내야 했다.
현재는 봄과 가을에 같은 밭에서 메밀을 두 번 심어 수확하는 이기작이 가능하다.
국내 기술로 육성한 새로운 품종 메밀과 외래종 메밀을 재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을뿐만 아니라 봄에도 소금을 뿌려놓은 듯, 팝콘이 쏟아진 듯 하얗게 핀 메밀꽃을 볼 수 있다.
과거 메밀은 제주에선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식량자원이었다.
다른 곡물보다 생명력이 강하고 생육 기간이 짧아 다른 농작물이 재해로 피해를 봤을 때 대체 작물로 활용할 수 있었다.
흉년과 자연재해로 기근이 심할 때 주식물 대신 먹을 수 있는 농작물이란 뜻의 '구황작물'에 딱 들어맞는 작물이다.
제주한라대 오영주 교수는 '제주향토음식 - 현황과 전망'이란 논문에서 "제주인의 식생활 역사는 한마디로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거친 환경과의 투쟁이었다"고 말한다.
화산섬 제주는 다른 지역과 다르게 돌이 많고 푸석진 토질, 7∼8월이면 여러 차례 태풍이 내습하는 기후 탓에 농사를 망쳐 극심한 기근을 겪는 일이 많았다.
제주에서 범벅과 죽, 국류와 같은 음식이 발달한 이유도 기근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때 메밀이 다양하게 활용됐다.
우선 제주가 메밀음식의 천국이라 할 정도로 제주에선 메밀로 만드는 음식 가짓수가 많다.
메밀밥, 메밀죽, 메밀범벅, 메밀수제비, 메밀묵, 빙떡, 돌레떡 등 정말 다양하다.
제주 향토음식점에서 맛보는 'ㅁ+ㆍ+ㅁ국'(정확한 아래아 발음은 아니지만 '몸국' 정도로 발음), 고사리 육개장의 걸쭉한 느낌은 메밀가루 덕분이다.
국물에 메밀을 넣어 맛을 한층 더 풍부하고 좋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명절이나 제사·혼례·상례 등 집안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상에 올리는 음식이 바로 메밀로 만든 빙떡이다.
빙떡의 유래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고려 충렬왕 때 제주도에 몽골인이 들어와 살면서 한라산 중산간에 메밀을 뿌렸다.
몽골인들은 제주 사람들이 찬 성질이 강한 메밀을 먹고 기가 허해져 몸이 약해지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혜로운 제주 사람들은 메밀의 찬 성질을 완화해주는 무를 곁들여 균형 잡힌 음식으로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제주에서는 산모에게 메밀로 한 음식을 먹였다.
출혈을 멎게 해준다, 부기를 빼준다, 모유가 잘 나오게 해준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어서다.
메밀껍질은 찬 성질이 있어서 머리의 열을 낮춰준다.
머리와 목덜미를 잘 받쳐줘서 베갯속으로 활용한다.
메밀피를 넣은 베개는 예부터 신생아나 아이 베개로 많이 사용했다.
메밀은 제주 사람들에게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있는 중요한 음식이자, 의례의 제물로 제주인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메밀에는 제주 사람들의 신화와 역사, 문화가 고스란히 담겼다.
[※ 이 기사는 '할망하르방이 들려주는 제주음식이야기', '제주 생활사', '신이 내린 씨앗 메밀' 책자와 '문무병의 제주, 신화' 연재물, '제주향토음식 - 현황과 전망',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제주메밀테마파크 기획 연구' 등을 참고해 제주 메밀을 소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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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