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게르스타인과 지휘자 페트렌코의 인상적인 하모니
신선하고 진귀한 퍼포먼스 선사한 서울시향 정기공연
21일 저녁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정기공연. 객석에는 듬성듬성 빈 자리가 보였다.

출연자들의 명성에 비하면 다소 아쉬운 부분이었다.

아마도 지휘자가 토마스 다우스고르에서 갑작스럽게 변경됐고, 공연 프로그램이 국내 관객에게 친숙한 인기작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공연은 작품 자체나 해석, 음향적 경험 차원에서 모두 진귀하고 신선했다.

예술 작품이 신선한 기운과 시각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 공연이었다.

피아니스트 키릴 게르스타인과 지휘자 바실리 페트렌코는 이미 스크랴빈 음반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그만큼 서로를 잘 아는 파트너다.

비록 페트렌코가 대체 지휘자로 들어왔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나은 조합이 됐다고도 볼 수 있었다.

또 게르스타인은 리스트에 정평이 난 피아니스트요, 페트렌코도 빼어난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음반을 선보인 적이 있으니 우연치고는 많은 것이 잘 맞아떨어진 공연이라 할 수 있다.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비록 슈만, 쇼팽, 브람스의 협주곡보다 인기도가 떨어지지만 개성이 넘치는 낭만주의 협주곡 최고의 걸작이다.

치밀하게 설계됐으면서도 살아 움직이는 듯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소리와 색채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곡은 단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대략 여섯 부분으로 나뉘어 저마다 색다른 개성을 뿜어낸다.

게르스타인은 곡을 훤히 꿰고 있는 듯했다.

처음의 서정적인 대목에서 유리알처럼 맑은소리는 참으로 싱싱했고, 이어지는 격렬하고 충동적인 움직임도 역동적으로 잘 표현됐다.

페트렌코가 이끄는 서울시향도 긴장감 있게 피아노와 짝을 이뤘다.

특히 음표의 외양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뉘앙스와 움직임이 선명하게 귀에 들리는 점이 가장 좋았다.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기교가 곳곳에서 빛을 발하면서도 전체 구조 안에 편입돼 있다.

이런 작품의 특성이 잘 드러나려면 관현악과의 호흡이 필수적이다.

페트렌코의 지휘는 빈틈이 없었고 유려했으며, 악단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그간 리스트의 매력을 잘 느끼지 못한 관객이라도 마음이 열렸을 법하다.

신선하고 진귀한 퍼포먼스 선사한 서울시향 정기공연
2부에서는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2번 다단조가 연주됐다.

브루크너 자신의 목소리가 비로소 나타난 최초의 작품이다.

다단조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연상시키는 조성이지만 브루크너는 투쟁을 그리지는 않는다.

그 대신 어두웠던 1악장의 첫 주제가 마지막 악장에선 밝고도 강력하게 되돌아온다.

마치 신이 임재하는 것처럼, 영웅이 귀환하는 것처럼. 교향곡 2번은 이후 브루크너의 거의 모든 교향곡의 공통분모가 될 작곡 콘셉트가 처음으로 나타난 작품이다.

페트렌코의 지휘는 놀라웠다.

그의 지휘 아래 서울시향은 내내 안정적인 호흡을 유지했다.

악단의 밸런스를 맞추느라 음향 구현에만 머무른 것도 아니었다.

때로는 과단성 있게 색채에 변화를 주면서도 전체 구조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서울시향은 여러 가지 면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줬다.

오스모 벤스케가 지휘를 맡은 뒤 가장 인상적인 변화는 곡의 큰 구조를 드러내는 긴 호흡과 그 안에서 움직이는 디테일 모두를 입체적으로 포착해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날 연주도 그러했다.

브루크너 교향곡에서 특징적인 반복 리듬과 고조, 미묘한 화성적 변화, 성부의 분화 등 세부가 선명하게 표현되면서도 전체를 끌고 나가는 구조의 힘이 명확하게 느껴졌다.

2악장에서 현악기군이 들려준 집중력, 세련된 음향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3악장 스케르초는 음향적 잠재력을 잘 보여준 연주였다.

바이올린과 첼로, 호른 등의 솔로 부분도 탁월했다.

페트렌코의 해석은 전체적으로 선명하고 극적이었다.

무엇보다 브루크너 음악의 텍스처를 초심자라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지휘가 투명했다.

롯데콘서트홀은 잔향이 긴 편이지만 페트렌코는 그 잔향을 오히려 여린 부분의 선명성을 높이는 데 적절히 활용했다.

그 결과 관현악의 강렬함과 실내악적인 고요함이 훌륭하게 대비됐다.

4악장 마지막 부분에서 1악장의 중심주제가 '영광스럽게' 귀환하는 장면은 효과적이고도 감명 깊었다.

이런 공연은 관객에게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감각, 새로운 귀를 선사해준다.

진지하고도 열정적인 페트렌코와 서울시향의 연주는 비교적 낯선 작품의 매력을 충분히 알리는 값지고, 진귀한 퍼포먼스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