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재무장, 스웨덴·핀란드 나토가입 검토, 폴란드 변화 주목
헝가리·세르비아·프랑스 등 선거에도 변수로 작용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럽 각국의 정치에 격변이 일어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전쟁이 유럽에서 벌어지면서 유럽 국가들의 정치 지형과 정책이 변곡점을 맞게 됐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유럽 최강국 독일의 대외정책이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서 자체 군사력 증강을 자제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집단 안보에 의존해왔다.

그러면서 독일은 경제 발전에 주력함으로써 유럽연합(EU)을 주도하는 경제 강국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으로 유럽에서 '신냉전'이 촉발되면서 독일은 사실상 재무장을 선언하고 지정학적 강자로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침공 사흘 뒤인 2월 27일 독일 국방정책 혁신 방안을 발표하면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전후 세계 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유럽 역사의 전환점이 됐다"고 선언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소극적인 대응으로 나토 전선의 '약한 고리'로 평가받던 독일은 우크라이나 침공이 현실화하자 태도가 바뀌었다.

전쟁 발발 이후 독일 정부는 대전차 무기 1천 정과 군용기 격추를 위한 휴대용 적외선 유도 지대공 '스팅어 미사일' 500기를 우크라이나에 공급했다.

군비증강에도 즉각 착수했다.

숄츠 총리는 독일군 현대화를 위해 올해 특별 연방군 기금을 설립, 1천억 유로(약 135조 원)를 투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앞으로 해마다 독일 국방비 지출을 국내총생산(GDP) 2% 이상 수준으로 늘리겠다"고 말했다.

나토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독일은 국방비로 GDP의 1.53%를 쓴 것으로 추산된다.

숄츠 총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독일 안보에 대한 투자를 훨씬 더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군사적인 중립을 지켰던 스웨덴과 핀란드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나토의 집단 안보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나토와 협력 관계를 유지해온 스웨덴과 핀란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군사적 비동맹주의 원칙을 깨고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는 등 나토 동맹에 접근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나토 정상회의와 국방장관 회의 등 동맹국이 참여하는 주요 회의에 두 나라도 초대받고 있다.

스웨덴과 핀란드는 유럽의 안정과 현상 유지를 위해 나토 가입 문제에 대해 선을 그어왔지만 이제 이들 국가는 공식적으로 나토 가입을 검토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유럽에서 폴란드의 위상 변화는 극적이다.

폴란드는 사법부 독립을 침해하고 언론을 탄압하는 등 '법치주의 파괴' 논란으로 EU와 갈등을 빚어왔다.

폴란드는 2004년 EU에 가입하면서 EU 조약을 지키겠다고 서약하고 EU의 경제·정치적 통합을 지지한다고 약속했지만 극우 정당이 집권하면서 EU와 대립각을 세웠다.

극우 성향의 '법과 정의당'은 2015년 총선에서 승리한 데 이어 2019년 재집권에 성공했다.

레흐 카친스키 전 대통령의 쌍둥이 형 야로슬라프 카친스키가 이끄는 이 정당은 서구식 민주주의와 다원주의 가치보다는 보수 가톨릭과 전통적 가치에 기반한 사회로 '개혁'한다며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정책을 폈다.

폴란드는 민주주의 후퇴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 작년 10월엔 '폴렉시트'(폴란드의 EU 탈퇴) 가능성까지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던 폴란드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유럽 통합과 연대에 앞장서는 모습이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난민을 적극 수용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개전 이후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 폴란드로 들어온 난민이 230만명을 넘었다.

폴란드는 전쟁 발발 전부터 우크라이나 난민을 받을 준비를 했다.

중동·아프리카에서 온 난민을 강하게 거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행보다.

또한 폴란드는 나토 유럽방위 전략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나토는 동유럽에 주로 순환 배치 병력을 유지했으나 러시아의 침공 이후 폴란드 등에 나토 병력을 영구적으로 주둔시키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제임스 스타브리디스 전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나토의 결속이 더욱 단단해지고 러시아 국경 부근, 특히 폴란드에 나토 병력이 영구적으로 주둔할 길을 열 것"이라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폴란드를 방문한 것은 폴란드의 전략적 중요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헝가리, 세르비아, 프랑스 등 유럽 국가의 선거에도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3일 실시된 헝가리 총선과 세르비아 대선에서 친러시아 성향의 집권당이 승리했다.

이번 승리로 4연임에 성공한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고 서방의 제재에 참여했으며 우크라이나 난민에게 국경을 여는 등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자국 영토를 통해 서방의 무기가 우크라이나에 지원되는 것을 막았고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를 계속 수입하겠다고 밝혔다.

헝가리 유권자들은 오르반 총리가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국익을 지켜줄 것으로 믿고 그에게 표를 던진 것으로 보인다.

세르비아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는 유엔 결의안에 동참했지만, EU의 제재에 대해선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참여하지 않았다.

프랑스 대선에서도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10일 프랑스 대선 1차 투표를 앞두고 연임에 도전하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극우 성향의 마린 르펜 국민연합(RN) 후보가 격차를 좁히며 뒤쫓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직접 만나고 여러 차례 전화 통화를 하는 등 국제 현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국내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동분서주했어도 결과적으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전쟁의 여파로 물가까지 상승하자 지지율이 정체됐다.

그래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여준 마크롱 대통령의 리더십이 선거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분석가들은 보고 있다.

파리 몽테뉴 연구소의 유럽 프로그램 책임자인 조지나 라이트는 미국 시사잡지 디애틀랜틱과 인터뷰에서 "프랑스인은 누가 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아마도 그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