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투항한 지식인들…35년전 미국 비평가의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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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저코비 '마지막 지식인'
"하나의 유령이 미국의 대학을―적어도 그 교수진 사이를―떠돌고 있다.
바로 권태라는 유령이다.
"
학술·문화 비평가인 러셀 저코비는 최근 번역·출간된 '마지막 지식인'에서 미국 지식인 사회를 이렇게 진단했다.
1960년대 이후 지식인들은 보조금과 종신계약의 노예가 돼 세미나용 논문을 발표하며 대학에 편입됐다.
안정적이고 일상적인 제도권에 흡수된 끝에 권태에 빠졌다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는 사회적 퇴행은 '공공 지식인'의 부재다.
공공 지식인은 교양 있는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발언함으로써 전문 분야를 벗어나 공론장에 영향을 미치는 지식인을 뜻한다.
고전적 지식인들은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하며 생활했고 박사학위논문 따위는 쓰지 않았다.
대학교수가 되는 일은 지식인의 요건이 아니었고, 뉴욕이나 시카고에 가서 기사와 책을 쓰는 일이 우선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같은 지식인 사회의 변화는 고등교육의 폭발적 성장에서 비롯한다.
1920년부터 50년간 미국 인구는 두 배 증가했지만 대학교수 자리는 열 배 늘었다.
반면 진지한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신문과 잡지는 꾸준히 줄었고 원고료도 거의 오르지 않았다.
매카시즘의 동력이 소멸된 1960년대부터 미국 대학은 이른바 신좌파 지식인들마저 대거 흡수했다.
급진주의자·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이 대학교수 자리를 얻어 자기들끼리만 읽는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신좌파 지식인들이 학문적 연구를 통해 전복하고자 한 바로 그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핵 재앙과 전 지구적 오염과 기아를 향해 미끄러져나가고 있지만,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는 다른 마르크스주의 비평가에 대해 글을 쓰며 밝은 얼굴로 마르크스주의의 학문적 미래를 거래한다.
" 저자는 미국 마르크스주의학계가 유럽에 대항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이론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텍스트를 '해체'하며 그의 글쓰기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1987년에 쓴 이 책에서 저자가 마지막 지식인 세대의 모범으로 꼽는 인물은 미술·건축비평가 루이스 멈퍼드(1895∼1990)와 문예평론가 에드먼드 윌슨(1895∼1972) 정도다.
이후에는 포스트모던을 논하는 교수들이 대학에 순응하며 생긴 공백을 일부 과학저술가들이 메웠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 올리버 색스, 칼 세이건, 재러드 다이아몬드 등의 저작은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다.
저자가 지적한 지식인 사회의 퇴조는 한국에서도 시차를 두고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독재정권에 저항한 참여적·지사적 지식인은 자취를 감췄고, 반체제 지식인·문인들의 거점이었던 문예지의 영향력은 사라지다시피 했다.
20여 년 전 김대중 정부는 종전 비판적 지식인과 동떨어진 '신지식인'이라는 용어를 내세워 부가가치를 창출하라고 요구했다.
지식의 총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오늘날, 사회 전반을 통찰하는 지적 거인의 등장이 전보다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다.
옮긴이 유나영은 "지식인의 시대가 가고 전문가의 시대가 왔다면, 인류사적 위기에 직면한 이제는 다수의 전문가가 공론장에서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어 '공공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필요성이 너무나 절박해졌다"고 적었다.
교유서가.
384쪽. 2만4천원.
/연합뉴스

바로 권태라는 유령이다.
"
학술·문화 비평가인 러셀 저코비는 최근 번역·출간된 '마지막 지식인'에서 미국 지식인 사회를 이렇게 진단했다.
1960년대 이후 지식인들은 보조금과 종신계약의 노예가 돼 세미나용 논문을 발표하며 대학에 편입됐다.
안정적이고 일상적인 제도권에 흡수된 끝에 권태에 빠졌다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는 사회적 퇴행은 '공공 지식인'의 부재다.
공공 지식인은 교양 있는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발언함으로써 전문 분야를 벗어나 공론장에 영향을 미치는 지식인을 뜻한다.
고전적 지식인들은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하며 생활했고 박사학위논문 따위는 쓰지 않았다.
대학교수가 되는 일은 지식인의 요건이 아니었고, 뉴욕이나 시카고에 가서 기사와 책을 쓰는 일이 우선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같은 지식인 사회의 변화는 고등교육의 폭발적 성장에서 비롯한다.
1920년부터 50년간 미국 인구는 두 배 증가했지만 대학교수 자리는 열 배 늘었다.
반면 진지한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신문과 잡지는 꾸준히 줄었고 원고료도 거의 오르지 않았다.
매카시즘의 동력이 소멸된 1960년대부터 미국 대학은 이른바 신좌파 지식인들마저 대거 흡수했다.
급진주의자·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이 대학교수 자리를 얻어 자기들끼리만 읽는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신좌파 지식인들이 학문적 연구를 통해 전복하고자 한 바로 그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핵 재앙과 전 지구적 오염과 기아를 향해 미끄러져나가고 있지만,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는 다른 마르크스주의 비평가에 대해 글을 쓰며 밝은 얼굴로 마르크스주의의 학문적 미래를 거래한다.
" 저자는 미국 마르크스주의학계가 유럽에 대항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이론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텍스트를 '해체'하며 그의 글쓰기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1987년에 쓴 이 책에서 저자가 마지막 지식인 세대의 모범으로 꼽는 인물은 미술·건축비평가 루이스 멈퍼드(1895∼1990)와 문예평론가 에드먼드 윌슨(1895∼1972) 정도다.
이후에는 포스트모던을 논하는 교수들이 대학에 순응하며 생긴 공백을 일부 과학저술가들이 메웠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 올리버 색스, 칼 세이건, 재러드 다이아몬드 등의 저작은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다.
저자가 지적한 지식인 사회의 퇴조는 한국에서도 시차를 두고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독재정권에 저항한 참여적·지사적 지식인은 자취를 감췄고, 반체제 지식인·문인들의 거점이었던 문예지의 영향력은 사라지다시피 했다.
20여 년 전 김대중 정부는 종전 비판적 지식인과 동떨어진 '신지식인'이라는 용어를 내세워 부가가치를 창출하라고 요구했다.
지식의 총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오늘날, 사회 전반을 통찰하는 지적 거인의 등장이 전보다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다.
옮긴이 유나영은 "지식인의 시대가 가고 전문가의 시대가 왔다면, 인류사적 위기에 직면한 이제는 다수의 전문가가 공론장에서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어 '공공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필요성이 너무나 절박해졌다"고 적었다.
교유서가.
384쪽. 2만4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