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정부 마지막 총리, 尹정부 초대 총리로 '호출'…한덕수는 누구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보수·진보 정권 넘나들며 승승장구…4개 정권서 고위직 거친 정통 엘리트 관료 출신
DJ정부 통상교섭본부장→盧정부 총리→MB정부 주미대사→朴정부 무역협회장
호남 출신·'한미FTA 전도사' 별명…'42년' 관직 떠난지 10년만 전면 재등장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냈던 한덕수(73) 전 총리가 3일 윤석열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후보자로 발탁됐다.
이명박 정부 때인 지난 2012년 주미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뒤 10년만의 전면 재등장이다.
민간부문 활동을 포함할 경우 한국무역협회장 기준으로 7년여만, 재단법인 기후변화센터 이사장 기준으로는 4년여만의 복귀다.
진보와 보수 정권을 넘나들며 중용됐던 백전노장의 귀환인 셈이다.
올해 73세로, 인선 과정에서 '고령'이라는 점이 걸림돌로 꼽히기도 했지만, "오래 했다는 것은 그만큼 경험과 위기 대응 능력이 있을 수 있다는 측면이 있고, 건강은 지금 너무나 좋다"는 게 한 후보자의 설명이다.
이미 총리를 지낸 인사가 또다시 총리로 기용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과거 보수와 진보 정권을 오가며 두 차례 총리를 지낸 경우는 김종필, 고건 전 총리 2명뿐이었다.
장면 전 총리는 이승만 정부에서만 두 차례, 백두진 전 총리는 이승만·박정희 정부에서 총리를 지냈다.
윤 당선인이 한 전 총리에게 15년 만에 다시 총리직을 맡긴 것은 그가 그동안 쌓아온 국정운영의 경험과 경륜을 토대로 엄중한 위기 상황에 놓인 경제와 외교·안보 분야를 아우르며 통할하고, 더불어민주당과의 협치를 이끌어낼 최적임자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정통 엘리트 관료 출신인 한 후보자는 40여 년간 4개 정부에서 고위 공직에 몸담은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로, 관료 사회에서는 입지전적 인물로 꼽힌다.
특히 진보 정권인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등의 고위직을 지낸데 이어 보수 정권인 이명박 정부에서도 대미 외교·통상 전문가로서 인정받아 주미대사를 지낸 특이한 이력을 갖춘 인물이다.
전북 전주 출신으로, 경기고를 나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수석 졸업한 뒤 1970년 제8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관세청 사무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옛 경제기획원(EPB·현 기획재정부)으로 옮겨갔다.
1982년 부처 간 교류 때 옛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미주통상과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상공부와 통상산업부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상공부 과장으로 재직하던 중 휴직계를 내고 미국 하버드대로 유학을 떠나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로, 영어 실력이 출중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 후보자는 보수와 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요직을 맡으며 계속 중용돼 왔다.
김영삼 정부에서 특허청장, 통상산업부 차관을 지냈고, 김대중 정부에서 초대 통상교섭본부장에 취임한 뒤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 대통령 정책기획수석비서관, 경제수석비서관을 역임했다.
통상산업부 시절부터 부하직원들로부터 '일이 취미인 사람', '지독한 일벌레'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업무 외에 한눈을 팔지 않는 스타일로 유명했다.
합리적 사고와 원만한 성품이 돋보이는 전형적인 엘리트 관료라는 평가를 받았다.
2002년 7월 '한중 마늘협상' 파동으로 잠시 공직생활을 접기도 했으나, 노무현 정부 제2대 국무조정실장으로 컴백해 고건·이해찬 총리를 잇달아 보좌했다.
이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낸 뒤 참여정부 마지막 국무총리를 맡는 등 승승장구했다.
2006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을 지냈고, 이후 대통령 직속 한미 FTA 체결지원위원회 위원장 겸 한미 FTA 특보를 맡아 한미 FTA 막판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때 한미 FTA 협상을 성공적으로 주도한 공을 인정받아 보수정권인 이명박 정부에서도 주미 대사로 발탁됐고 3년간 재임했다.
그는 한미 FTA 비준 과정에서 미국의 각 지방정부와 의회를 순회하며 한미FTA 비준 설득에 공을 세워 '한미 FTA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 초 한미 FTA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던 상황에서 미국 내 여론을 돌리고 미 행정부와 의회를 설득하는 '임무'를 맡았고, 2011년에 한미 FTA가 미 의회에서 비준되는 데 역할을 했다.
관료 출신으로 '무색무취'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한 후보자는 2005년 3월 부총리 취임 이후 정책의 일관성을 위해 "색깔없는 경제부총리가 되겠다"고 공언하며 이러한 논란에 대한 정면돌파에 나선 바 있다.
그는 당시 자신을 "변화를 지향는 합리적인 시장주의자"로 규정, "나는 O형 국가의 O형 관료"라며 "O형 국가는 경제주체들이 활동하고 정부는 이를 뒤에서 받쳐주는 '촉진자(facilitator)' 역할을 하는 형태"라고 설명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인 2012년에 한국무역협회장으로 취임해 3년간 일했다.
당시 그가 자주 쓰던 말이 '우문현답'으로,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의미였다.
2015년 한국무역협회장을 그만둔 뒤로는 기후변화센터 이사장, 청주세계무예마스터집 공동조직위원장, 지속가능전력정책연합 초대 의장을 지냈다.
문재인 정부 첫해였던 2017년 대법원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작년부터 최근까지 에쓰오일 사외이사를 지냈다.
병역은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다.
부인은 서양화가 출신의 최아영(74) 씨이고, 슬하에 자녀는 없다.
▲ 전북 전주 (73) ▲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 경제기획원 정책조정과장 ▲ 상공부 미주통상과장 ▲ 통상산업부 차관 ▲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 주OECD 대사 ▲ 대통령 정책기획·경제수석비서관 ▲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장 ▲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 ▲ 한미 FTA체결지원위원회위원장 겸 대통령 특보 ▲ 국무총리 ▲ 국민경제자문회의 자문위원 ▲ 주미대사 ▲ 한국무역협회 회장
/연합뉴스
DJ정부 통상교섭본부장→盧정부 총리→MB정부 주미대사→朴정부 무역협회장
호남 출신·'한미FTA 전도사' 별명…'42년' 관직 떠난지 10년만 전면 재등장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냈던 한덕수(73) 전 총리가 3일 윤석열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후보자로 발탁됐다.
이명박 정부 때인 지난 2012년 주미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뒤 10년만의 전면 재등장이다.
민간부문 활동을 포함할 경우 한국무역협회장 기준으로 7년여만, 재단법인 기후변화센터 이사장 기준으로는 4년여만의 복귀다.
진보와 보수 정권을 넘나들며 중용됐던 백전노장의 귀환인 셈이다.
올해 73세로, 인선 과정에서 '고령'이라는 점이 걸림돌로 꼽히기도 했지만, "오래 했다는 것은 그만큼 경험과 위기 대응 능력이 있을 수 있다는 측면이 있고, 건강은 지금 너무나 좋다"는 게 한 후보자의 설명이다.
이미 총리를 지낸 인사가 또다시 총리로 기용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과거 보수와 진보 정권을 오가며 두 차례 총리를 지낸 경우는 김종필, 고건 전 총리 2명뿐이었다.
장면 전 총리는 이승만 정부에서만 두 차례, 백두진 전 총리는 이승만·박정희 정부에서 총리를 지냈다.
윤 당선인이 한 전 총리에게 15년 만에 다시 총리직을 맡긴 것은 그가 그동안 쌓아온 국정운영의 경험과 경륜을 토대로 엄중한 위기 상황에 놓인 경제와 외교·안보 분야를 아우르며 통할하고, 더불어민주당과의 협치를 이끌어낼 최적임자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정통 엘리트 관료 출신인 한 후보자는 40여 년간 4개 정부에서 고위 공직에 몸담은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로, 관료 사회에서는 입지전적 인물로 꼽힌다.
특히 진보 정권인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등의 고위직을 지낸데 이어 보수 정권인 이명박 정부에서도 대미 외교·통상 전문가로서 인정받아 주미대사를 지낸 특이한 이력을 갖춘 인물이다.
전북 전주 출신으로, 경기고를 나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수석 졸업한 뒤 1970년 제8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관세청 사무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옛 경제기획원(EPB·현 기획재정부)으로 옮겨갔다.
1982년 부처 간 교류 때 옛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미주통상과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상공부와 통상산업부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상공부 과장으로 재직하던 중 휴직계를 내고 미국 하버드대로 유학을 떠나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로, 영어 실력이 출중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 후보자는 보수와 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요직을 맡으며 계속 중용돼 왔다.
김영삼 정부에서 특허청장, 통상산업부 차관을 지냈고, 김대중 정부에서 초대 통상교섭본부장에 취임한 뒤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 대통령 정책기획수석비서관, 경제수석비서관을 역임했다.
통상산업부 시절부터 부하직원들로부터 '일이 취미인 사람', '지독한 일벌레'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업무 외에 한눈을 팔지 않는 스타일로 유명했다.
합리적 사고와 원만한 성품이 돋보이는 전형적인 엘리트 관료라는 평가를 받았다.
2002년 7월 '한중 마늘협상' 파동으로 잠시 공직생활을 접기도 했으나, 노무현 정부 제2대 국무조정실장으로 컴백해 고건·이해찬 총리를 잇달아 보좌했다.
이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낸 뒤 참여정부 마지막 국무총리를 맡는 등 승승장구했다.
2006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을 지냈고, 이후 대통령 직속 한미 FTA 체결지원위원회 위원장 겸 한미 FTA 특보를 맡아 한미 FTA 막판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때 한미 FTA 협상을 성공적으로 주도한 공을 인정받아 보수정권인 이명박 정부에서도 주미 대사로 발탁됐고 3년간 재임했다.
그는 한미 FTA 비준 과정에서 미국의 각 지방정부와 의회를 순회하며 한미FTA 비준 설득에 공을 세워 '한미 FTA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 초 한미 FTA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던 상황에서 미국 내 여론을 돌리고 미 행정부와 의회를 설득하는 '임무'를 맡았고, 2011년에 한미 FTA가 미 의회에서 비준되는 데 역할을 했다.
관료 출신으로 '무색무취'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한 후보자는 2005년 3월 부총리 취임 이후 정책의 일관성을 위해 "색깔없는 경제부총리가 되겠다"고 공언하며 이러한 논란에 대한 정면돌파에 나선 바 있다.
그는 당시 자신을 "변화를 지향는 합리적인 시장주의자"로 규정, "나는 O형 국가의 O형 관료"라며 "O형 국가는 경제주체들이 활동하고 정부는 이를 뒤에서 받쳐주는 '촉진자(facilitator)' 역할을 하는 형태"라고 설명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인 2012년에 한국무역협회장으로 취임해 3년간 일했다.
당시 그가 자주 쓰던 말이 '우문현답'으로,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의미였다.
2015년 한국무역협회장을 그만둔 뒤로는 기후변화센터 이사장, 청주세계무예마스터집 공동조직위원장, 지속가능전력정책연합 초대 의장을 지냈다.
문재인 정부 첫해였던 2017년 대법원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작년부터 최근까지 에쓰오일 사외이사를 지냈다.
병역은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다.
부인은 서양화가 출신의 최아영(74) 씨이고, 슬하에 자녀는 없다.
▲ 전북 전주 (73) ▲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 경제기획원 정책조정과장 ▲ 상공부 미주통상과장 ▲ 통상산업부 차관 ▲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 주OECD 대사 ▲ 대통령 정책기획·경제수석비서관 ▲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장 ▲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 ▲ 한미 FTA체결지원위원회위원장 겸 대통령 특보 ▲ 국무총리 ▲ 국민경제자문회의 자문위원 ▲ 주미대사 ▲ 한국무역협회 회장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