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스타인이 작곡한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넘버(삽입곡) 'Tonight'.

좋은 리더란 어떤 사람일까요. 리더십의 형태는 너무도 다양하기에 단정해서 말하긴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정답 없는' 질문에 '정답에 가까운' 인물들은 떠올려 볼 수 있겠죠. 많은 분들이 기업인들을 주로 생각하시겠지만, 음악계의 리더들도 자주 회자되곤 합니다.

음악과 리더십은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요. 하지만 서로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잘 이끌며 최상의 하모니를 빚어내야 하는 지휘자야말로 훌륭한 리더십이 필요한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휘자가 누구냐에 따라 오케스트라 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악기는 정말 좋은 소리를 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이를 훌륭하게 해낸 지휘자로는 대표적으로 두 사람이 언급됩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끌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였던 레너드 번스타인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리더십은 완전히 극과 극이었습니다. 카라얀이 '제왕적 리더십'의 표상이었다면, 번스타인은 '소통의 리더십'으로 유명합니다. 번스타인은 미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지휘자이자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작곡가이기도 하죠. 온화하고 유연했던 리더 번스타인의 삶 속으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소통의 지휘자이자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작곡가, 번스타인[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번스타인의 부모님은 우크라이나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인이었습니다. 낯선 이국 땅에서 가게를 운영하며 자수성가를 했죠. 그의 어머니는 힘들고 바쁜 와중에도 아들에게 끊임없이 음악을 들려주고 즐길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번스타인이 음악을 정식으로 공부하겠다고 하자 반대했는데요. 나중엔 그의 꿈을 받아들이고 적극 지원했습니다.

번스타인은 하버드에서 음악·철학·인류학을 공부했고 졸업 이후 미국을 대표하는 음악 교육기관인 커티스 음악원에 들어갔습니다. 이곳에서도 그는 특출난 재능을 보이며 뛰어난 성적을 거뒀죠.

그리고 25살이 되던 해 큰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번스타인은 당시 뉴욕 필하모닉의 보조 지휘자에 입단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 필하모닉의 카네기홀 공연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객원 지휘자였던 브루노 발터가 독감에 걸려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된거죠.

당일에 갑자기 연주회를 취소할 순 없었던 뉴욕 필하모닉은 과감한 선택을 내렸습니다. 갓 들어온 보조 지휘자를 대신 세우기로 한 겁니다. 그렇게 번스타인은 리허설도 한번 하지 못한 채 공연을 하게 됐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다음날 발행된 신문들엔 번스타인의 이름으로 가득했습니다. 폭발적인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여줬다는 호평이 쏟아졌죠. 번스타인은 순식간에 이름을 알리며 뉴욕 시립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됐습니다.

이후엔 성공 가도를 달릴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오랜 시간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유명세를 얻었으나 경력이 워낙 짧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던 거죠. 그는 이리저리 여러 악단을 떠돌아다니며 지휘를 해야 했고, 수입이 안정적이지 못해 경제적으로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하지만 결코 좌절하거나 멈추지 않고 연습을 이어갔습니다. 번스타인이 남긴 말은 오늘날까지도 유명합니다.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아내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

번스타인이 지휘하고 뉴욕 필하모닉이 연주한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레너드 번스타인 유튜브 채널

36살이 되던 해에 다시 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CBS TV 다큐멘터리 시리즈 '버지니아'에 출연하게 된 겁니다. 뛰어난 외모와 열정적인 지휘, 유려한 입담으로 번스타인은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습니다.

이를 발판으로 3년 후엔 자신에게 엄청난 유명세를 안겨줬던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됐죠. 평소 부단히 갈고닦는 자는 우연처럼 찾아온 기회를 기적으로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번스타인이 뉴욕 필하모닉에서 보여준 행보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는 "좋은 지휘자는 좋은 연주를 이끌어내는 것뿐 아니라 단원들이 연주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이 말을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연습에 앞서 늘 단원들에게 관심을 보이며 많은 대화를 나눴죠. 대화의 중요한 원칙도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야기와 주장을 말하려 하지 않고, 단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습니다.

지휘자라고 해서 군림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과 단원들은 동등한 위치라고 강조했죠. 그러자 단원들의 자존감은 갈수록 높아졌고, 실력도 함께 일취월장 했습니다. 단원들과의 소통을 꺼렸던 카라얀과는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번스타인은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한 지휘자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카라얀이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고전·낭만주의 음악에 심취했던 것과 달리, 번스타인은 바로크 음악부터 현대 음악까지 시대를 가로지르며 많은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의 작품들도 적극 발굴하고, 말러의 교향곡 전곡을 녹음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장르의 벽도 과감히 허물었습니다. 클래식에만 갇혀 있지 않고 뮤지컬 음악에도 도전했습니다. 오늘날까지 명작으로 꼽히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작곡을 맡은 겁니다. 이 작품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로도 만들어 국내 개봉하기도 했죠.

뮤지컬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적으로 각색했는데요. 토니와 마리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와 함께 백인들과 유색 이민자들의 갈등과 비극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에 맞춰 'Tonight' 'Somewhere' 'Maria' 등 명곡들도 작품 내내 흐르죠. 노래들을 들어보면 클래식 음악을 해왔던 번스타인이 작곡을 했다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는 어떤 장르든 훌륭히 소화할 줄 아는 능력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번스타인이 지휘하고 빈 필하모닉이 연주한 브람스의 '교향곡 3번'./레너드 번스타인 유튜브 채널

번스타인은 자리에도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즐겼습니다. 작곡에 매진하기 위해 1969년 뉴욕 필하모닉을 과감히 떠났죠. 베를린필에 34년 동안 머물렀던 카라얀과 상반됩니다. 번스타인은 활동 무대도 유럽으로 옮겨 다양한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췄습니다.

음악뿐 아니라 의미 있는 사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흑인 인권 신장을 위한 목소리를 냈으며, 반전운동에도 나섰습니다.

번스타인은 72세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는데요.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많은 미국인들이 슬픔에 빠졌습니다. 번스타인의 운구 행렬을 본 건설 노동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의 이름인 '레니'를 외쳤을 정도라고 합니다.

완벽에 가까운 리더십과 인간상을 보여준 번스타인. 그 비결은 누구와도 가까워지려 하고 무엇이든 도전하려 했던 유연하고 자유로운 사고방식에 있지 않았을끼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