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계 미국인 예술가 이안 쳉이 삼성미술관 리움에 전시된 ‘사절’ 2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경훈 기자
중국계 미국인 예술가 이안 쳉이 삼성미술관 리움에 전시된 ‘사절’ 2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경훈 기자
영상 속에서 새로운 세계가 살아 움직인다. 게임 개발 도구와 인공지능(AI)으로 만들어낸 세계관 속에서 서로 다른 배경과 동기를 가진 캐릭터들이 서로 교류하고 반응한다.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2일 개막하는 중국계 미국인 이안 쳉(38)의 개인전 ‘이안 쳉 : 세계건설’에 나온 작품들이다. 리움이 올해 첫 전시이자 5년 만에 여는 개인전 작가로 선택한 쳉은 컴퓨터 예술계의 젊은 대가다. 그는 자신이 구상한 방대한 세계관을 게임 개발 도구인 게임엔진과 AI 기술을 이용해 가상세계에 구현한다. 상호작용하는 AI의 모습을 통해 AI와 인간의 관계, 인간 의식의 구조 등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PS1, 영국 런던 서펜타인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 등에 참가했다. 전시 개막을 앞두고 지난 25일 리움에서 그를 만났다.
이안 쳉 ‘Life after BOB’  리움 제공
이안 쳉 ‘Life after BOB’ 리움 제공
이번 전시에는 2015~2017년에 만든 ‘사절(Emissaries)’ 3부작, 2018~2019년의 ‘BOB’, 리움의 지원을 받아 지난해 만든 신작 ‘Life after BOB’ 등 다섯 점을 만날 수 있다. 그중 사절 3부작은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대표작이다. 장르는 작가가 고안한 ‘라이브 시뮬레이션’. 가상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보여주는 시각 예술이다.

“‘심시티’ 같은 일종의 비디오게임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다만 관객이 조작하는 게 아니라 자동으로 진행된다는 점이 다르죠. 한 판이 끝나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플레이하는데 그때마다 상황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예측불가능하고 복잡한,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작품이지요.”

통상 예술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는 게임의 형식을 빌려온 데다 애니메이션풍의 3D(3차원) 그래픽은 다소 거칠다. 하지만 주제의식은 결코 가볍지 않다. 1부에서는 자의식 없이 조상신의 계시에 맹종하며 살아가는 한 부족이 등장한다. 그중 우연한 계기로 자의식을 갖게 된 소녀는 마을 옆에 있는 화산이 곧 분화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민들을 설득해 대피시키려고 시도한다. 2부에서는 멸종한 인류의 모습을 복원하고 연구하는 AI가, 3부에서는 기계에서 생명체가 되려는 AI가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며 좌충우돌하고, 다른 AI들의 협조 여부에 따라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한다. 결말이 나면 다시 처음 상황으로 돌아가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야기의 전개 양상은 매번 다르다. 결말까지 걸리는 시간도 몇 분에서 며칠까지 다양하다. 쳉은 “복잡한 생태계를 예술로 만든 프랑스의 현대미술 거장 피에르 위그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했다.

홍콩 이민자 출신 디자이너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이력은 특이하다. UC버클리에서 인지과학과 미술을 전공했고,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시각예술 석사학위를 받았다. 학부 졸업 후 ‘스타워즈’ ‘터미네이터’ ‘쥬라기공원’ 등 영화의 시각효과를 맡은 인더스트리얼 라이트&매직에서 일하며 프로그래밍과 3D 그래픽 작업 경험을 쌓았다.

그는 6년 동안 고작 다섯 점의 작품을 만들어낸 과작(寡作)의 작가다. 작품 하나에 엄청난 돈과 인력,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리움이 지원한 신작 ‘Life after BOB’를 만드는 데도 엔지니어와 애니메이터, AI 전문가 등 대규모 인력이 투입됐다. 전시는 두 개의 상영관에서 이뤄진다. 첫 번째 상영관에서 애니메이션을 통해 스토리와 주제를 숙지하고, 두 번째 상영관에서는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조작하며 직접 작품 속 세계를 탐험할 수 있다.

파격적인 형식과 심오한 내용에 비해 설명은 다소 불친절하다. 사절 3부작은 영상 형식의 작품인데도 지긋이 앉아서 볼 만한 의자가 부족하다. 산뜻한 현대미술 작품 감상을 기대했다가는 당황스러운 경험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새로운 장르를 맛본다는 열린 마음으로 접근한다면 작가가 마련한 미래 디지털 예술의 전범(典範)과 만날 수 있다. 쳉은 “한국은 기술과 예술의 만남에 열려 있는 나라인 만큼 관객들이 작품을 잘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