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보드랍게' 박문칠 감독…김순악 할머니 '피해 이후'의 삶 조명
"성폭력 피해자들 보드랍게 대하는 것, 치유와 공감 폭 넓히는 길"
"피해자 상(像)이라는 건 딱 떨어지게 존재할 수 없어요.

일본군 위안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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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3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보드랍게'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순악 할머니의 삶을 돌아본 작품이다.

할머니의 구술 기록과 각종 자료 그리고 그를 만난 사람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여든두 해에 걸친 인생사를 들려준다.

일본군 위안부는 그간 '김복동', '주전장', '아이 캔 스피크', '허스토리', '귀향', '눈길' 등 수많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통해 다뤄진 소재다.

그러나 대부분 피해 당시 상황을 그리거나 할머니가 된 피해자들이 문제를 고발하고 싸우는 내용에 한정돼왔던 게 사실이다.

반면 '보드랍게'는 위안부로 겪은 일이 있고 난 후 이어진 김 할머니의 고된 삶의 역정에 눈을 맞췄다.

가녀린 소녀나 강단진 투사로 굳어진 위안부 이미지를 정면으로 깨트렸다.

작품은 전주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상,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아름다운 기러기상을 받는 등 호평을 들었다.

최근 화상으로 만난 박문칠 감독은 "이분들에게도 아가씨, 아줌마, 엄마였던 시기가 있다"며 "어쩌면 더 힘들었을 수도 있는 그때를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도 위안부에서 일을 끔찍하다고 회고하시지만, 그 이후의 일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어하시더라고요.

어디에도 말 못 할 갖은 고생에 대해서요.

우리가 듣고 싶은 것만 들을 게 아니라 할머니가 말하고 싶은 걸 들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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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에 위안부에 끌려가 수년간 착취당한 김 할머니는 자유의 몸이 된 후에도 유곽과 술집을 전전했다.

동두천에서는 미군을 상대로 '색시 장사'도 했다.

동네에서 제일 가난했다는 김 할머니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던 때였다.

남자들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던 그의 이런 선택을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박 감독은 "우리가 너무나 편안한 위치에서 과거와 피해자를 재단할 수는 없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위안부 피해자가 당연히 성(性) 산업에 종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어요.

근데 당시 김 할머니가 경험한 세계는 그게 전부였거든요.

'이미 버린 몸뚱아리'라고 생각한 상황이기도 했죠. 사회 최약자인 못 배우고 돈도 배경도 없는, 게다가 위안부 피해까지 본 분이 살아간 방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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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할머니는 위안부 단체 활동가들에게는 성 노동자로 일한 과거를 여과 없이 털어놨으나 공적인 자리에서만큼은 입을 꾹 다물었다고 한다.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라는 일본 정부 주장의 논거가 되기 싫었던 이유도 있지만, 우리 사회 안에서 받는 모진 손가락질 역시 두려웠다.

박 감독도 김 할머니가 성 산업에 몸담은 사실을 어느 정도 보여줘야 할지 고민이 깊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사회가 이 부분에 대해 성숙하게 논의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해 누락하지 않았다"며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현대 성폭력 사건도 똑같이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영화에는 미투 운동을 통해 성폭행 피해를 고발한 여성들이 등장해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과거 김 할머니처럼 '고생했다, 애먹었다'는 사회의 보드라운 말이 필요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김 할머니의 삶을 다룬 책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카이'를 읽고 곧바로 출연을 수락했다고 한다.

박 감독은 미투 당사자들을 섭외한 이유에 대해 "과거의 이야기를 과거에만 묻어두지 않고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연결고리가 있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영화 제목인 '보드랍게'는 순악 할머니뿐만 아니라 다른 폭력·성폭력 피해자들 또한 듣고 싶어 하는 말이나 처우, 위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피해자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 자세이기도 하죠. 우리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생전에 보드랍게 대해주지 못했다면, 지금 우리 주변 피해자들을 보드랍게 대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만 우리 사회에서 치유와 공감의 폭이 커지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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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