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 '마스터 스위치' p53, 상처 치유에 핵심 역할
집단 세포 이동 주도하는 '리더 세포' 발현ㆍ제거 조절
영국 브리스톨대 연구진, 저널 '사이언스'에 논문
상피 손상 복구에 왜 항암 신호 단백질이 관여할까

p53는 유전자 활성화를 폭넓게 제어하는 '전사 인자(transcription factor)' 단백질이다.

일종의 '마스터 스위치' 기능을 하는 p53는 유전자의 항암 신호도 조절한다.

암이 생길 때 두 개 중 하나꼴은 p53의 항암 신호 조절이 교란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상당수 암에선 p53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암 억제 기능을 상실할 뿐 아니라 되레 암 종양의 성장을 부추긴다고 한다.

이런 p53 단백질이 손상된 상피 조직의 복구와 상피 세포의 집단 이동에도 핵심 역할을 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 발견은 상피 세포의 조직 복구 메커니즘을 더 잘 이해하고, 나아가 상처를 더 빨리 낫게 하는 치료법 개발에 도움을 줄 거로 기대된다.

영국 브리스톨대 과학자들이 수행한 이 연구 결과는 지난 11일(현지 시각) 저널 '사이언스(Science)'에 논문으로 실렸다.

상피 손상 복구에 왜 항암 신호 단백질이 관여할까
상피 조직은 신체의 외부 및 내부 표면을 덮고 있는 모든 조직을 말한다.

예를 들면 몸 안에서 혈액, 공기, 음식물 등이 접촉하는 건 모두 상피 조직이다.

상피에 난 상처는 저절로 낫기도 하는데 이는 온전한 세포들이 집단 이동해 상처 난 곳을 메우기 때문이다.

상처가 생기면 이런 일에 특화된 '리더 세포'(leader cell)가 나타나 집단적인 '상피 세포 이동'(epithelial migration)을 촉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손상된 상피 조직에 어떻게 리더 세포가 생기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이번 연구의 최대 성과는 p53를 축으로 작동하는 상피 복구 메커니즘을 상세히 밝혀낸 것이다.

상피 조직이 손상되면 다른 세포를 리더 세포로 전환하는 분자 프로그램이 작동했고, 그 결과 상처 난 부분이 신속히 복구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처가 다 메워지고 나서 이주성이 강한 리더 세포를 제거하는 데도 같은 프로그램이 관여했다.

이렇게 맡은 일을 끝낸 리더 세포가 사라져야 손상 조직이 정상적인 상피 구조를 회복할 수 있었다.

바깥 세포층에 찰과상을 낸 상피 모델에 실험해 보니, 리더 세포의 출현을 유도하는 분자 신호가 포착됐다.

이렇게 상처가 생기면 그 틈새의 경계에 위치한 세포에서 p53과 p21 두 단백질 수치가 올라갔다.

이는 상피 손상이 p53 등의 발현을 자극해 세포 이동 프로그램을 촉발한다는 걸 시사한다.

그러나 일단 상처 난 부위가 복구되면 온전한 상피 세포가 리더 세포를 제거했다.

손상된 상피세포는 상처가 봉합되는 데 도움을 준 다음 정상적인 상피 형태를 갖춘 기능 조직을 유지하는 데 쓰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일을 모두 p53가 맡았다.

다시 말해 p53는 리더 세포에 상처 봉합을 시작하라는 신호를 줬고, 상피 조직이 복구된 뒤엔 리더 세포의 제거를 유도했다.

상피 손상 복구에 왜 항암 신호 단백질이 관여할까

이 발견은 암 치료법 개선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논문의 공동 제1 저자를 맡은 브리스톨대 세포ㆍ분자 의대(CMM)의 줄리아 필리아 박사는 "세포의 집단 이주는 다른 영역, 예컨대 암 같은 질병에서도 중요하다"라면서 "암이 전이할 땐 원발 암에서 떨어져 나온 암세포 무리가 함께 다른 부위로 이동한다"라고 말했다.

p53 같은 단백질이 암의 전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게 밝혀지면 현재 쓰이는 암 치료법이 수정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일단 세포 실험(in vitro)에서 확인된 이 메커니즘을, 살아 있는 인간의 세포(in vivo)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 시험할 계획이다.

이 부분이 검증되면 리더 세포를 선별적으로 조작해 주변 세포의 안전한 집단 이동과 상처 복구를 촉진할 수 있는지 확인할 예정이다.

상처 복구 과정에서 리더 세포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완전히 이해하면, 암세포 등의 집단 이주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치료법 개발도 가능할 거라고 연구팀은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