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포연에 휩싸인 ‘시계 제로’의 절박한 상황이다. 사방에서 적들이 어금니를 드러내고선 호시탐탐 목줄을 물어뜯을 기세다. 같은 편이라고 믿었던 이들은 우왕좌왕할 뿐, 과연 등 뒤를 맡길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한때 세계 유일한 슈퍼파워로 불렸지만 도처에서 험난한 과제에 맞닥뜨린 요즘 미국의 처지가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우크라이나와 아프가니스탄, 대만에서 동시다발적인 도전에 직면한 초강대국은 언제까지 방황만 할 것인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일한 허버트 맥매스터가 쓴 《배틀그라운드》는 위태로운 세계질서에 관한 보고서다. 러시아와 중국, 남아시아, 중동, 이란, 북한을 둘러싼 국제 정세를 진단하고, 유일 강국으로서 ‘자아도취’에 빠져 무사안일주의로 일관하던 미국의 각성을 촉구한다. 백악관에서 ‘그랜드 게임’에 참여했던 시절에 맞닥뜨렸던 외교적 갈등도 구체적으로 담겼다.

[책마을] 위태로운 세계…가장 강력한 무기는 '민주주의'
미국은 ‘세계의 경찰’을 자부하기는커녕 각지에서 수세에 몰려 있다. 지난해 아프가니스탄에선 굴욕적으로 철수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자마자 중국은 즉시 대만에 대한 위협을 강화했다. 러시아는 대놓고 우크라이나 국경 지대에 군대를 집결했다. 시진핑 중국 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북한의 김정은 등이 일제히 미국과 날을 세우고 나섰다.

미국을 위협하는 원투 펀치는 러시아와 중국이다. 두 나라는 모두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 패턴으로 움직인다. ‘게임의 규칙’은 폐기된 지 오래다. 이들은 국제법을 비롯해 교역 및 상업에 관한 어떤 규칙도 따를 생각이 없다.

푸틴 집권 이후 러시아는 대외 공세의 고삐를 늦춘 적이 없다. 1999년에는 체첸을, 2008년엔 조지아를 침공했다. 2014년엔 우크라이나로부터 크림반도를 빼앗아 합병했다. 키르기스스탄과 아르메니아에는 유럽연합과 경쟁하기 위해 고안된 유라시아경제연합에 가입하라고 압박했다. 그뿐만 아니라 에너지를 무기화해 유럽 국가들을 길들이고 있다.

러시아의 까칠한 자세는 냉전 붕괴로 상처받은 자존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소련의 몰락을 목도했던 현재의 러시아 지도자들은 조국의 잃어버린 위엄을 되찾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세력을 확장하고 조지아(2003년)와 우크라이나(2004년), 키르기스스탄(2005년)에서 잇달아 독재정권이 무너지는 ‘색깔 혁명’이 터진 것은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배후에는 서방이 있다고 믿었다.

중국 역시 세계 중심 국가로의 복귀를 노리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더는 역량을 감추고 때만 기다릴 생각이 없다. 중국 지도자들은 이웃 국가에 대놓고 “중국은 대국, 다른 나라는 소국”이라고 외친다. 국제법을 무시하면서 남중국해에 인공 섬을 건설했다. 인민해방군은 대만 방공식별구역과 한국 영공을 침범했다. 히말라야 국경 지대에선 인도군과 충돌했다. 홍콩을 탄압하는 한편 신장의 위구르족에 대한 민족말살정책도 자행하고 있다.

도발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중국의 해킹부대는 미국과 영국, 일본, 한국의 금융, 통신, 정보기술(IT) 기업과 군사연구소를 표적 삼아 각종 지식재산을 빼갔다. 중국에 대한 높은 경제 의존도를 무기로 삼는 것은 예사다. 감비아와 상투메프린시페 등에는 투자를 늘린 대가로 대만과의 단교를 요구했다. 코로나19 발생의 책임은 회피하면서 중국의 전염병 대응이 우월하다고 자화자찬한다.

중국과 러시아만 상대하기도 벅차지만 지뢰밭은 널려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제2의 베트남이 됐고, 9·11사태 이후 테러 조직의 위협은 줄지 않고 있다. 이란은 틈만 나면 신경을 거스른다. 동맹국 관리도 쉽지 않다. 한국의 역대 진보정권은 햇볕정책, 달빛정책 등으로 북한에 핵개발의 시간과 자금만 제공했다. 한국과 일본은 과거사에 발목이 잡혀 반목을 이어간다.

저자는 이 같은 외환(外患)에 자유와 민주주의, 법치 같은 보편적 가치를 앞세운 정공법으로 맞설 것을 주장한다. 민주주의는 스스로 회복할 능력이 있지만, 전체주의는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민주적인 통치 방식은 전체주의 국가들의 압박에 대항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라는 진단이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