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 박사, '민족의 영웅 안중근'으로 삶과 생각 조명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지 않는 세계 꿈꾼 안중근 의사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 …(중략)… / 동포 동포여 어서 빨리 대업을 이룰지어다 / 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로다 / 만세 만세여 대한동포로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했던 안중근 의사의 외침이 지금도 천하에 쩌렁쩌렁 울려오는 듯하다.

현장에서 곧바로 체포돼 투옥된 안 의사는 이듬해 3월 26일 교수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안 의사의 기상은 언제나 꿋꿋했다.

'장부는 죽을 때에도 마음이 강철과 같고 의사는 위험에 처해도 기개가 구름 같다'는 말처럼 의사의 일생은 시대를 초월해 커다란 감동을 자아낸다.

안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동안 자서전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차례로 짓는다.

우리나라에서 '역사'라는 제목이 붙여진 자서전은 '안응칠역사'가 처음이었다.

'역사'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에 그 뜻을 깨닫고 옥중에서 집필에 나섰던 것이다.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지 않는 세계 꿈꾼 안중근 의사
한국학중앙연구원 객원교수 등을 지낸 전우용 박사는 '안중근이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상을 정립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서 출발해 신간 '민족의 영웅 안중근'을 펴냈다.

저자는 한국인의 의식이 담긴 '근대적 개념어'에 관해 연구하면서 이를 활용해 선구적 사상을 정립한 이가 바로 안 의사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책은 안 의사가 동양평화론을 세우기 위해 어떻게 기반을 마련하고 어떤 방식으로 사고했는지 세밀하게 분석해나간다.

제1부 '안중근의 삶'은 의사의 삶에서 신화를 걷어내 그의 일생을 가감 없이 소개하고, 2부 '안중근의 생각'은 사형 직전에 저술한 '동양평화론'을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이어 3부 '안중근에 관한 생각'에서는 의거 직후 벌어진 사건들과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를 보여주며 의사의 사상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살핀다.

1879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안 의사는 고종 폐위 소식을 듣고 의병투쟁을 벌이기 위해 러시아령 연해주로 건너갔다.

그가 조직한 의병부대는 1908년 함북 경흥에서 일본군 초소를 급습해 5명을 포로로 잡았으나 "우리가 서로 목숨 걸고 싸우게 된 것은 이토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라고 훈계하며 풀어준다.

하지만 안중근 부대는 풀려난 일본 병사들의 역습을 받아 많은 동지를 잃었다.

이에 부대는 급속히 와해했고, 안 의사는 동포들의 비난 섞인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다.

안 의사는 패전 책임을 지고 이듬해 '동의단지회'를 결성해 동지들에게 진 목숨 빚을 갚고자 한다.

동의단지회는 '대한독립 회복과 동양평화 유지'를 위해 태극기 혈서로 맹세했고, 안 의사는 이토를 처단하면 동포들의 민심을 단합하고 일본의 침략 정책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하고 멸사봉공의 일념으로 장도에 나섰다.

홍콩의 '화자일보'는 거사 직후 이 사건에 대해 "생명을 버리려는 마음을 가졌기에 그의 마음은 안정되었다.

마음이 안정되었기에 손이 안정되었다.

손이 안정되었기에 탄알마다 명중했다"고 보도한다.

안 의사가 감옥에서 당당하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었던 데는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뜻이 있었다.

의사는 옥중에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아 일본 간수들을 놀라게 했고, 그 모습에 감격한 간수들이 휘호를 부탁하며 존경심을 드러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정립한 동양평화론은 10년 뒤 발표되는 '기미독립선언서'의 토대가 됐다.

안 의사의 핵심 가치인 정의·인도·동포애를 담고 있는 기미독립선언서는 이후 면면히 이어져 지금의 제6공화국 헌법에 이르고 있다.

저자는 "한국 다수에게 안중근이라는 이름이 표상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반일 민족주의'다.

하지만 그의 평화론은 동양 제국(諸國)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 항구적 연대의 전망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고 상기시킨다.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동아시아연대론자였고, 군인인 동시에 평화주의자였다는 것이다.

한길사. 648쪽. 2만4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