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구로공단 여공들은 타이밍이라는 이름의 각성제를 반강제로 먹고 철야를 했다.
야근 중에 졸기라도 하면 재봉틀 바늘에 손톱이 찔리거나 프레스 기계에 손이 눌리는 사고를 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미싱 돌아가는 소리가 '고객님, 안녕하십니까'로 시작하는 인사말로 바뀌었지만, 노동환경의 질은 큰 변화가 없다.
구로디지털단지 내 콜센터에서 일하는 상담사들은 '현대판 여공'으로 불린다.
가정의학과 전문의이자 인류학자인 김관욱 덕성여대 교수의 '사람입니다, 고객님'(창비)은 콜센터의 비인간적 노동조건, 상담사들이 겪는 몸과 마음의 건강 문제를 들여다보는 책이다.
과거 구로공단 여공들이 타이밍으로 잠을 쫓았다면, 오늘날 콜센터 상담사들은 업무로 겪는 스트레스를 흡연으로 해소한다.
서울 금천구청이 2012년 구로디지털3단지 내 7개 업종 여성 노동자의 건강실태를 조사한 결과, 콜센터 상담사의 흡연율이 26.0%로 가장 높았다.
전체 여성 흡연율의 세 배를 넘는 수치다.
이들에게는 감정을 억누르는 게 일인데다 흡연실 말고는 쉴 만한 공간도 마땅찮다.
한 상담사는 '흡연이냐, 뛰어내리느냐'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고 했다.
사측도 흡연을 불가피하게 여겨 사무실 내에 흡연공간을 마련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노동환경 개선보다는 동선을 최소화해 노동시간을 더 확보하려는 목적에 가깝다.
관리자는 모니터링을 통해 담배를 피우거나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를 비운 시간을 실시간 감시한다.
한 콜센터에서는 하루에 단 20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콜이 밀리면 흡연은 물론 화장실도 갈 수 없다.
저자가 만난 상담사 대부분은 두통과 만성피로, 수면장애, 청력 손실, 손목과 허리 등 근골격계 곳곳의 통증을 호소했다.
이들은 통증을 일종의 의무로 여기고 개인적 해결책에 의지했다.
먹는 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상처를 치유하느라 몇 달 새 체중이 급하게 늘었다는 상담사들이 많았다.
실적에 따라 월급을 차등 지급하는 경쟁체제는 마음의 병을 불러온다.
관리자는 '경주마'로 낙점한 S급 상담사에게 고객명단을 몰아줘 경쟁을 부추긴다.
몇 천원이 든 돈봉투를 창문에 붙여놓고 실적을 올리면 떼어가도록 하는 회사도 있다.
상담사들은 좀더 좋은 고객명단을 받기 위해 빵과 커피·과일을 상납하거나, 무한경쟁 끝에 동료에게 따돌림과 인격모독을 당한다.
2020년 3월 한 콜센터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했다.
언론이 주목한 이유는 콜센터의 노동환경보다 집단감염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 콜센터에서 일하던 상담원들은 어떻게 됐을까.
사측은 확진 또는 자가격리로 업무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며 임금을 삭감했다.
저자는 감정노동이라는 관점 뒤에 숨겨진, 모욕적 노동환경에 순응하고 체념하는 상담사들의 '정동'에 주목한다.
여기서 정동은 '만남에 의해서 발생하는 느끼고, 행동하고, 지각하는 몸의 능력'을 뜻한다.
저자는 '신체가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저항하고 전환할 수 있는 확장된 능력'으로 건강을 재정의한 의료사회학의 논의를 빌어 상담사들의 아픔을 설명한다.
'억압하는 상황에 저항하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능력이 소실되는 것'이 아픔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388쪽. 2만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