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 독립운동사 연구가 '우당 이회영 평전' 개정판 출간

을사늑약 반대 운동과 을사오적 척살 운동, 신민회 창립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 주도,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 지도자 양성 등등.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1867~1932)은 일제 침략기와 강점기에 영원한 자유인이자 아나키스트로서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예순여섯 나이에도 일본 관동군 사령관을 처단하고 침체된 독립운동을 되살리기 위해 최일선에 기꺼이 나섰다.

그리고 밀정의 밀고로 붙잡혀 뤼순감옥에서 고문 끝에 숨을 거둘 때까지 불굴의 삶으로 일관했다.

독립운동사·친일반민족사 연구가이자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김삼웅 씨는 저서 '우당 이회영 평전'을 통해 우당의 삶과 사상을 상세하고 깊이 있게 들려준다.

타락한 시대, 강권주의 시대에 순결한 모습을 온전히 간직하면서 치열하게 저항하다가 산화한 일생을 되짚었다.

이번 책은 2011년 출간됐다가 절판된 '이회영 평전' 내용을 일부 수정·보완하고 사진 자료도 대폭 교체해 펴낸 개정판이다.

올해가 선생의 순국 90주기여서 재출간이 한결 새롭게 다가온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110주년이었던 지난해 6월에는 서울 남산 예장공원에 선생과 여섯 형제의 자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한 '이회영기념관'이 세워져 각종 자료와 유품이 전시됐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표상, 우당 이회영의 삶과 사상
선생은 반강권과 반권위주의, 자유와 자주, 자치주의를 추구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나아가 조국 해방 뒤 새 국가 건설의 방략으로 아나키즘을 택하고 무장독립투쟁을 활발히 전개했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비롯해 다수의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자신은 높은 자리에 앉은 적이 없을 만큼 감투 따위는 단연코 마다했다.

저자는 "자신의 호인 '우당(友堂)'처럼 선생은 이념과 노선을 뛰어넘어 독립운동가들의 영원한 벗이자 따뜻하고 든든한 안식처였다"며 "더불어 갖은 고난 속에서도 여유를 즐길 줄 아는 풍류객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공적을 포장하지 않은 가운데 겸손하게 살아가는 자존과 명예의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거부였던 이회영 가문은 우리 역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 집안이다.

일제와 친일세력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이회영 6형제는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일체의 기득권을 내려놓은 뒤 가족 60여 명과 함께 망명했는데, 독립군 양성소였던 신흥무관학교도 이를 기반으로 설립됐다.

졸업생 3천500여 명은 만주 지역과 중국 관내에서 항일독립운동의 핵심이 되고 항일투쟁의 선봉대 역할을 했다.

의열단, 서로군정서, 통의부, 참의부, 신민부 등 만주 일대 무장투쟁 단체에는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어김없이 참여했다.

안타깝게도 독립운동에 헌신한 6형제 가운데 해방된 조국의 땅을 다시 밟은 이는 다섯째 이시영뿐이었다.

나머지 형제들과 후손들은 타국 땅에서 고초를 겪고 아사 등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어떤 불행도 마다하지 않고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높은 신분의 사회적·도덕적 책무를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진정한 표상이 바로 이회영 일가였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우당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평생을 곁눈 팔지 않고 독립운동이라는 일직선을 우직하게 걸었다.

그의 신념과 사상적 지향이 컴퍼스의 바늘이나 정삼각형의 날카로운 직선형이라면, 다정다감하고 섬세한 성품은 계란과 같은 타원형이었다.

행동철학은 혁명가적이고 전사의 기질을 품었고, 품성은 낭만주의적이고 사색형이며 예술과 시문을 즐기는 풍류아였다.

그런가 하면 아나키스트의 담백함과 초연함은 계산을 모르는 경론가였다.

"
두레. 464쪽. 2만원.
'노블레스 오블리주' 표상, 우당 이회영의 삶과 사상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