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협 이끌며 2009년 용산·2014년 세월호 등 투쟁 함께해
"민주 열사들 유공자로 인정해야"…법 제정 촉구하다 뜻 못 이루고 별세
"우리는 한열이처럼 먼저 간 사람들 삶을 대신 사는 사람들이야. 그래서 평생 가슴에 안고 사네. 혹여나 잊어버릴까, 희미해질까 싶어서."
9일 별세한 고(故) 배은심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명예회장은 지난달 26일 국회 앞 민주유공자법 제정 촉구 농성장에서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이같이 말했다.

1987년 아들 이한열 열사가 숨진 뒤 배 여사가 살아온 35년은 '이 땅에 다시는 아들처럼 죽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의지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아들이 죽기 전까지 평범한 주부였던 그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을 만나 유가협 활동을 시작하며 투사가 됐다.

경찰의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고(故) 박정기 씨가 '유월의 아버지'로 불렸다면, 배 여사는 '유월의 어머니'로 불렸다.

1991년 대학생 분신 정국을 비롯해 2009년 용산참사, 2014년 세월호참사, 2016년 박근혜 하야 촉구 촛불집회 등 억울한 죽음이나 부조리한 사회에 맞서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함께했다.

1998년에는 민주화법 및 의문사 진상규명법 제정을 촉구하며 422일간 농성을 벌였고, 2007년부터 2013년까지는 유가협 회장을 맡아 전국의 민주화·인권투쟁 현장을 지켰다.

투쟁의 선두에 서다 보니 여러 차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1989년 전교조 해직 교사 복직을 요구하다 연행된 딸을 면회하려다가 폭행을 당하는 등 거리에서 맞고 최루가스를 마시는 일이 일상이었다.

고인은 "전두환 집 앞에서 '죗값을 치르라'고 소리를 지르면 경찰이 '닭장차'에 실어서 난지도 같은 데 내려줬다"고 과거를 회상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부터는 유가협 가족들과 함께 20여년째 공전 중인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이한열을 비롯한 민주 열사들이 여전히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남아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배 여사는 유가족을 외면하는 정치권에 섭섭한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는 "촛불로 들어선 정부니까 대전 현충원, 광주 망월동, 대구 2·28 학생의거 기념식까지 부르는 곳은 다 찾아갔다"며 "그렇게라도 우리 자식들이 유공자가 돼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정부는 쳐다도 안 보는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얼마 전 꿈에 한열이 묘지가 보이는데 눈이 한가득 덮여있고 고드름이 얼어있는 거야. 일어나자마자 망월동에 전화했더니 한열이 묘에 눈이 진짜 왔다고 하더라고. 걔가 그런 식으로 한을 얘기하는 것 아니겠어?"
그러나 배 여사는 이한열 열사가 민주유공자가 되는 것을 끝내 보지 못한 채 9일 오전 향년 82세로 눈을 감았다.

지난 수십 년간 고인을 지켜본 장남수(79) 유가협 회장은 "고인은 먼저 간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머니가 되려고 35년 동안 민주주의 발전에 몸을 던진 투사였다"며 "남은 가족들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민주유공자법을 만들어 고인의 뜻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유족은 고인이 안치된 광주 조선대병원에서 향후 장례 절차 등을 결정할 예정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