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억할게요" 일제에 맞선 이금주 회장 추모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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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시민사회단체, 이날 오후 빈소에서 '추도의 밤' 행사
"누님,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위해 희생하고 고생한 당신의 모습을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할 것입니다.
"
14일 강제징용 등 일본 정부에 맞서 피해자 인권 활동에 헌신한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의 빈소를 찾은 장영도(88) 씨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1945년 8월 해방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장씨는 가족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오는 귀국선(우키시마호)에 올랐다가 폭침당해 가족을 모두 잃은 유족이자 피해 당사자다.
구사일생으로 홀로 목숨을 부지한 장씨는 1990년 관련 소송을 준비하고 있던 이 회장을 우연히 만나 함께 소송을 하는 등 인연을 이어왔다.
장씨는 "고인은 그야말로 힘없고 큰 소리 내지 못하는 피해자들을 위해 희생했다"며 "고인이 주도한 소송에 참여했던 여러 사람은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생전에는 고생도 많이 하고 외로웠겠지만, 이제는 하늘에서 평안한 안식을 누리길 기도했다"고 말했다.
1942년 결혼 2년 만에 남편이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숨지면서 이 회장은 8개월 된 어린 아들을 홀로 키워야 했다.
해방된 이후에도 이 회장을 비롯한 일제 피해자들은 군사·독재 정권에서도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다.
이 회장은 그렇게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크고 작은 일을 챙기며 생활하다 민주화의 바람이 분 1987년 6월 항쟁 이후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듬해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 유족회장을 맡은 그는 본격적인 대일본 투쟁에 나섰다.
특히 피해자 숫자만 1천명이 넘는 이른바 '천인 소송'을 끌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회장이 광주·전남 지역 곳곳을 찾아다니며 피해자 1천명 이상을 찾아내 손수 피해 사실을 수집·정리한 자료는 이 소송의 근거가 됐다.
이후에도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관부 재판(위안부), 근로정신대 피해 소송 등 잇따라 6건의 소송을 이어갔다.
소송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을 오간 것만 80여 차례가 넘지만, 번번이 패소했다.
일본 법정에서 기각당한 것만 17차례에 이른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양금덕 할머니 등 일본 소송 원고들이 2018년 한국 법원에서 끝내 승소 판결을 받으면서 이 회장의 노력도 결실을 보게 됐다.
다만 일본과 전범기업은 이 판결에도 불복해 사죄와 손해배상을 여전히 이행하지 않아 국내 재산이 압류된 상태다.
이 회장의 별세 소식에 국내외 인사들의 추모 메시지가 이어지고 있다.
양금덕 할머니는 "피해자들을 위해 오랜 시간 수많은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힘들다는 내색 한번 없었다"며 "하늘나라에 훌훌 날아가셔도 우리 일을 살펴 주실 것"이라고 추모했다.
이 회장의 부고 소식을 안타까워하는 일본 시민단체의 조화와 조전(추도글)도 잇따랐다.
천인소송 변호를 맡았던 일본 야마모토 세이타 변호사가 조화를 보내왔고, 관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하나후사 도시오 사무국장은 "이 회장의 의연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며 "당신과 만나 싸울 수 있었던 것에 감사드린다"고 고인을 기렸다.
광주 시민사회단체 역시 장례위원회를 구성해 이날 오후 추도의 밤 행사를 열 계획이다.
/연합뉴스
"
14일 강제징용 등 일본 정부에 맞서 피해자 인권 활동에 헌신한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의 빈소를 찾은 장영도(88) 씨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1945년 8월 해방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장씨는 가족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오는 귀국선(우키시마호)에 올랐다가 폭침당해 가족을 모두 잃은 유족이자 피해 당사자다.
구사일생으로 홀로 목숨을 부지한 장씨는 1990년 관련 소송을 준비하고 있던 이 회장을 우연히 만나 함께 소송을 하는 등 인연을 이어왔다.
장씨는 "고인은 그야말로 힘없고 큰 소리 내지 못하는 피해자들을 위해 희생했다"며 "고인이 주도한 소송에 참여했던 여러 사람은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생전에는 고생도 많이 하고 외로웠겠지만, 이제는 하늘에서 평안한 안식을 누리길 기도했다"고 말했다.
1942년 결혼 2년 만에 남편이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숨지면서 이 회장은 8개월 된 어린 아들을 홀로 키워야 했다.
해방된 이후에도 이 회장을 비롯한 일제 피해자들은 군사·독재 정권에서도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다.
이 회장은 그렇게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크고 작은 일을 챙기며 생활하다 민주화의 바람이 분 1987년 6월 항쟁 이후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듬해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 유족회장을 맡은 그는 본격적인 대일본 투쟁에 나섰다.
특히 피해자 숫자만 1천명이 넘는 이른바 '천인 소송'을 끌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회장이 광주·전남 지역 곳곳을 찾아다니며 피해자 1천명 이상을 찾아내 손수 피해 사실을 수집·정리한 자료는 이 소송의 근거가 됐다.
이후에도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관부 재판(위안부), 근로정신대 피해 소송 등 잇따라 6건의 소송을 이어갔다.
소송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을 오간 것만 80여 차례가 넘지만, 번번이 패소했다.
일본 법정에서 기각당한 것만 17차례에 이른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양금덕 할머니 등 일본 소송 원고들이 2018년 한국 법원에서 끝내 승소 판결을 받으면서 이 회장의 노력도 결실을 보게 됐다.
다만 일본과 전범기업은 이 판결에도 불복해 사죄와 손해배상을 여전히 이행하지 않아 국내 재산이 압류된 상태다.
이 회장의 별세 소식에 국내외 인사들의 추모 메시지가 이어지고 있다.
양금덕 할머니는 "피해자들을 위해 오랜 시간 수많은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힘들다는 내색 한번 없었다"며 "하늘나라에 훌훌 날아가셔도 우리 일을 살펴 주실 것"이라고 추모했다.
이 회장의 부고 소식을 안타까워하는 일본 시민단체의 조화와 조전(추도글)도 잇따랐다.
천인소송 변호를 맡았던 일본 야마모토 세이타 변호사가 조화를 보내왔고, 관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하나후사 도시오 사무국장은 "이 회장의 의연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며 "당신과 만나 싸울 수 있었던 것에 감사드린다"고 고인을 기렸다.
광주 시민사회단체 역시 장례위원회를 구성해 이날 오후 추도의 밤 행사를 열 계획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