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성종은 어떻게 성군이 되었나
조선의 아홉 번째 임금 성종(成宗)은 막연히 성군(聖君)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와 그의 치세에 대한 대중의 지식은 박약하기 그지없다. 성종의 아들 연산군을 다룬 숱한 영화와 사극을 통해 폐비 윤씨의 사사(賜死)를 둘러싼 야사만이 흥밋거리로 소비될 따름이다. 《성종의 국가경영》은 성종 시대를 전공한 전문가가 당시 국정을 이끄는 동력이 된 정치이념과 정책의 작동원리를 분석하고, 성종의 리더십을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성종의 시대는 통상 수성(守成)의 시기로 여겨진다. 즉위년(1469년)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되는 등 왕조 초기의 권력 투쟁이 마무리되고 국정 운영의 틀이 제도화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성종은 왕위를 계승할 적장자가 아니었던 탓에 기반이 불안정했다. 장인 한명회를 비롯한 대신들의 입김은 강했고, 13세에 준비 없이 즉위했기에 정치적 역량을 논할 상황이 아니었다. 학문적 소양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왕좌에 오를 때까지 책을 거의 읽지 않았던 성종은 왕이 된 이후에야 학문을 시작했다.

하지만 재위 첫 7년 동안 연간 228~243일간 경연(經筵)에 참여해 수업을 받는 등 적극적으로 실력을 쌓은 뒤엔 차곡차곡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왕의 손에 들린 무기는 ‘교화(敎化)’라는 이념이었다. 당시는 유교가 제도화 단계를 넘어서 가치의 내면화를 추구했던 때였다. 선대의 탐오(貪汚)한 사풍(邪風)을 바로잡기 위해 ‘교화’를 정치 과제로 선택한 성종은 언관의 지지를 얻어 공론정치를 강화해 나갔다. 대신과 대간의 대립을 중재하며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는 ‘설득의 리더십’을 선보인 것이다.

성종이 추구한 ‘교화’는 폐비 윤씨 사건을 이해하는 열쇠도 된다. 저자는 정사에 근거해 성종이 윤씨가 자신을 죽이고 어린 아들을 왕으로 올려 수렴청정을 꾀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본다. 이런 윤씨의 행위는 ‘풍속의 교화’에 정면으로 어긋났고, 위정자가 모범을 보이고 국모에게 엄격한 의무와 책임을 묻는 차원에서 ‘사사’라는 강수를 뒀다는 설명이다.

폐비·사사의 배경으로 성종과 윤씨 사이의 불화,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미움 등을 꼽았던 기존 연구의 한계를 넘어선 분석은 보편적인 설득력이 있다. 비록 정사가 내놓은 스토리가 야사보다 재미는 없더라도, 진실에 한발 더 다가선 것일 수 있기에….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